기타

[은위/조아라]대좌님! 우리 대좌님!-6

블군ㅎwㅎ 2015. 4. 16. 04:18

 

Chapter6. 악몽을 뛰어넘는 이유

 

“........”

 

태원은 조용히 주위를 둘러봤다.

헤죽헤죽 웃으며 류환의 옆에 서서 해랑의 뒤로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고 있는 최완우가 보였다. 그렇지, 너는 그게 꿈이었던가태원은 천천히 옆으로 눈을 옮겼다. 굳은 눈의 류환이 자신을 직시해 온다. 단단하게 굳은 눈. 너는 무엇을 결심했네? 태원은 여전히 고지식하리 만치 단단해진 눈에 시선을 피했다. 저런 눈은 곤란하다. 태원이 돌린 눈이 이내 멈칫-하고 멈춰버린다. 짧게 흔들린 연갈색 눈. 그 눈 안에 박힌 날카로운 붉은 눈이 아프다. 너는 왜 여기 있는기네? 태원에게 있어 수혁, 서수혁은 아킬레스건이었다. 자신의 안을 박박 긁는 듯한 그 기묘한 기분이 뇌까지 기어와 갉작거린다. 예상과는 달리 조용히 한 쪽 벽에 기대어 자신을 보는 이는 리해진이 아니라 서수혁이었다. 태원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떳다. 바로 뒤에서는 황재오가 으르렁거리며 해랑을 노려본다. 그에게 있어 질투는 살아남는데 필수불가결한 감정이었다. 그 질투가 없었으면 백두조장까지 올라오지도 못 했겠지. 바로 옆에서는 시헌이 뒷머리를 긁적인다. 어떻게 살아남을까-하는 머리 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 중 가장 끝까지 살아남을 놈은 아마 이 놈이리라-하며 생각하던 태원은 멈칫-하고 생각을 끊었다. 이 무슨 불필요한 생각을.... 태원은 낮게 혀를 찼다.

 

.. ! 보시오! 김대좌 동지!!”

 

바닥에 쓰러져 헐떡이는 이들 중 한 명이 일어나 태원에게 바락거린다. , 서상구 교수. 태원의 눈이 느릿하게 그에게 향한다. 운이 좋은지 일부로인지 별 부상 없는 그가 눈에 거슬린다. 그의 군홧발 아래에 동지라고 부르던 이들이 신음하며 쓸어져있다.

 

왜 이제 오시는 거요! 보시오!! 나도 부상을 당했단 말이오!! 당신들이 나를 지켜야지! 공화국에 돌아가면 이 일을

 

바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린다. 더 이상 안에서 울리는 소리도 없는데 왜 이리 시끄러울까. 태원은 턱-하고 서상구의 얼굴을 한 손으로 그러쥐었다. 검은 장갑 한 겹을 통해 전해져오는 감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 교수. 충분히 알겠으니....”

 

짜증마저 서린 목소리가 서릿발 같다. 뒤에선 황재오가 흠칫 몸을 움츠린다. 위에서도 몇 번 들어본 적 없는 감정섞인 목소리. 시헌만이 왠 일로 흥미롭단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본다.

 

그만 닥치라.”

 

신음조차 없이 그 강한 손아귀에 잡혀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박힌 서상구 교수가 이내 까무룩 혼절한다.

그 어찌 소름끼치기까지 한 모습을 보면서도 최완우와 황재오 외에는 그 누구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천천히 자신의 발아래로 쓰러지는 서상구를 본 태원이 이내 방금 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얼굴을 들어 그네들을 바라보았다.

 

“...들으라.”

 

무감각한 얼굴, 아니 그보다는.... 수혁은 인상을 찡그렸다. 언제인가 보았던, 그래 북에서 언제나 보았던 얼굴이다. 시체. 시체의 그것과 무엇 하나 다를 것 없는 생기 하나 볼 수 없는 눈과 얼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지 않은... 아니, 북에서보다 더 지독한 심지어 사기(死期)’마저 느껴지는 그런 모습. 그것을 느낀 건 자신뿐일까? 슬쩍 돌아본 류환의 얼굴이 어느 때 보다 굳어있다. 해랑의 실실 웃는 입가가 굳어있고 눈이 차게 식어있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이는 일어서라우. 우리 모두는 여기서 죽는다. 그러나....”

 

결벽증.. 그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는 태원이 습관처럼 검은 장갑을 살핀다. 서상구의 피가 묻은 장갑이 거슬린다.

 

임무는 완수하고 죽는다. 명에 따라-”

 

조용히 말을 잊는 태원의 눈이 깊게 침체되어 있다. 그의 뒤로 있는 황재오가 천천히 총을 정비하며 꺼내든다. 시헌은 한 숨을 쉬며 주섬주섬 자신의 가오리(해랑의 도검과 비슷하나 손잡이가 길거 움켜쥘만한 잡이가 없다.)를 꺼내들었다. 그네들 주위의 꿈틀거리던 몇몇이 일어난다. 끽해야 두엇 정도쯤. 그 모습에 태원은 한 숨을 쉬었다. 잔정이 많군. 태원은 자신의 옆에 굴러다니며 신음하는 이의 목을 무참히 밟아 숨통을 끊었다.

 

즉결 처형이다.”

 

태원의 간결한 말이 끝나자마자 총성이 울려 퍼진다.

발에 걸리는 시체들과 공사 자재들이 거슬린다. 태원은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난장판이 되어가 싸움판을 보았다. 조장 넷이 상대라. 금방 끝나겠군, 기래. 입에 천천히 담배를 빼어 물었다. 그러고보니 이 담배는 어디서 났더라? 태원은 목구멍을 넘어오는 짙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흐릿한 시선 너머의 전장을 구다보았다.

 

마치...

이게 마지막이라는 듯 눈에 새기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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냐하-? 안녕하신가, 대장 동지?”

-...누구냐.

이야, 내래 모르네?”

 

해맑게 웃는 진우가 천천히 몇 건물 건너의 보이는 건물 하나를 말끄러미 망원경으로 보며 자신의 어깨와 볼로 북의 휴대폰을 지탱한 채 전화를 했다. 나오는 목소리에 심기 불편한 감정이 그대로 들어난다. 하회탈 같은 웃음을 띄운 진우가 아무렇지 않게 황재오에게서 빼돌린 휴대폰으로 연결한 리무혁 대장동지에게 인사를 하며 묻는다.

 

, 모르네? 허기야. 시간이 꽤나 지났제?”

 

헤죽헤죽 웃는 얼굴에 살기가 어려 있다.

 

... 남석칠 외화벌이국장... 밑에 있던 정보부 지 석환 중좌...아네?”

-.. 누구냐.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에 해맑게 웃은 진우는 입가에 좀 더 진한 미소를 띄웠다. 얼핏 보기에는 그리 해맑은 미소건만... 어찌 이리 간악하게 느껴질까.

 

석환 중좌 아들래미... 단지, 그 뿐인기야. 기러고보니, 슬슬 내래가 보낸 선물이... 터졌을 텐디, 거는 괜찮네?”

-...!!!!

 

귓가로 들리는 경악성에 진우는 좀 더 맑게 웃어보였다. 지금쯤이면 아마 이리저리 투입했던 반북 연합들의 합작품. 수용소를 막고 있던 외벽이 폭발했다. 국제 사회에 북한의 비리와 구글이나 유튜브에는 마구잡이식으로 개돼지만도 못 한 북한 인민들의 현실이 동영상으로 떠돌아다닌다. 심지어는 수용소를 감시하는 감시 카메라의 영상에 인체실험 영상까지도 떠오른다. 실시간 검색어로 북한이라는 키워드가 올라온다. 아마 죽을 맛일기야? 낄낄대며 휴대폰 너머로 우왕좌왕 소란스러운 그네들을 비웃는다.

 

즐겁네? 내래는.... 즐거워. 아주.”

 

-하고 아직 무엇도 회색 시멘트 창 너머로 휴대폰을 던진다. 빠르게 아래로 추락하는 휴대폰에서는 아직도 비명 같은 웅성거림이 들린다. 쌤통이야, 아주.

그러면서 드는 진우의 눈이 복잡했다. 이 기묘한 감각은 무얼까. 무엇을 놓쳤을까. 천천히 드는 망원경이 찝찝하다. 이 순간만큼은 그리 자신에게 없는 무력이 안타까워진다. 한숨을 내쉬며 들어 올린 망원경을 통해 우르르르- 국정원들이 건물 하나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포위만 할 뿐이겠지만... , 모를 사태를 위해-

 

방해 좀 해주라우.”

-~케이!

 

발랄한 목소리와 함께 퍽-하고 국정원들 바로 앞에서 터지는 철조물들을 보며 진우는 혀를 찼다. 에라이, 무서운 간나.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아.... 젠장.”

 

부디라는 말이 오늘만큼 간절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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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입 안을 맴돌던 연기가 아스라하게 비오는 콘크리트 너머를 가리며 흩어진다. 자신의 바로 앞에서 피 튀기는 생사를 넘나드는 혈투가 벌어지는데도 딱히 태원은 상관없다는 듯 느릿하게 담배를 필뿐이다. 잠깐의 담배 몇 모금 마셨을까-

 

“.....”

 

-하고 담배를 떨어트리는 그의 곁으로 싸움의 여파로 밀려온 해랑과 엉켜 재오가 넘어져온다. 두터운 군홧발로 담배를 즈려 밟으며 재오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던졌다. -하는 소리와 함께 뒤로 빠진 재오의 눈에 해랑의 가오리 쥔 손이 강제로 꺽여나가는 것이 보인다.

 

좀 더 시야를 넓히라 했지.”

 

감각 없는 말투에 비식 해랑이 웃으며 잡히지 않은 다른 팔을 들어 팔꿈치를 태원의 관자놀이를 향해 날린다. 그 매서운 기세를 느끼지도 못 하는지 태원이 스윽 뒤로 고개를 빼며 어느 새 가까이 온 수혁의 가오리를 잡아 틀어 해랑의 목을 향하게 한다.

-하는 혓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며 수혁의 무릎이 태원의 복부를 쳐올린다. 그 공격에 간격을 벌리기 전 태원은 해랑을 그대로 잡아 수혁을 향해 던져버렸다. 엉켜 콘크리트 바닥을 뒹구는 모습을 보며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난 태원이 고개를 들어 상황을 보았다.

 

“......”

 

과연. 상위권 조장 4명에 일반 전사들은 이미 전투불능, 시헌만이 헐떡이며 주춤 류환과의 거리를 벌려나와 있다. 본디 시헌은 이런 정면 전투보다는 암살에 특화된 녀석. 이 정도 버틴 것도 기특한 것, 아니.... 태원의 눈가가 조금 일그러졌다. 기묘한 감각. 혀를 찼다. 그의 눈에 어느 새 합류한 리해진이 보였다. 과연... 저격수들을 맞았는 듯 해진의 몸에 피가 튀어있다. 잠깐의 짧은 견제에 어느 새 느릿하게 일어선 황재오가 뒤로 온다.

헐떡이는 숨에 분함이 가득 차 있다. 태원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숙이며 헐떡이는 재오의 머리를 쓰다듬고 만다. , 이런... 습관이란. 혀를 차며 매섭게 자신에게 덤벼오는 수혁의 수도를 옆으로 비스듬히 넘기며 무릎으로 똑같이 복부를 찍어 올린다.

 

-!”

패턴이 진부하다 했지.”

 

나이답지 않은 힘에 수혁이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그대로 태원에게 잡힌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태원은 그대로 힘준 팔을 휘돌리며 다가오는 해진에게 던지며 수도를 날렸다. 정확히 목, 동맥으로. 살기 하나 없으나 명백히 사살을 목적으로 한 손날에 누구의 얼굴 할 것 없이 질린다.

 

, 젠장!”

 

바로 옆에서 들리는 해랑의 욕에 태원은 좀 더 몸을 밀며 뛰어들 듯 휘두르는 해랑의 가오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하고 뒤에서 재오가 한치의 오차 없이 해랑의 가오리를 맞춰 날려버린다. 해랑이 혀를 차며 몸을 날려 태원을 밀어낸다. 한 치 앞에서 수도가 치워짐에 수혁이 급하게 숨을 몰아 내쉬며 자세를 잡았다. 얼결에 수혁을 받아낸 해진이 혀를 차며 흘끗- 류환을 보았다. 벽에 등을 기대며 쓸어져 숨을 몰아쉬는 시헌을 두고 어느 새 재오를 향해 달려든다.

 

! 이 배신자 새끼들이!!”

 

지독한 경멸을 담은 재오가 몸을 빼내며 간신히 간격을 벌린다. 힐끔- 해진의 눈에 해랑과 합세한 최완우가 복부에 무언가 박히는 모습이 보인다.

슬쩍 눈가를 찌푸려 보자....

 

면도칼?”

 

그러고보니 해진이든 누구든 단 한 번도 대좌의 가오리를 본 적이 없었다. 해진의 눈이 둥그레 뜨며 무언가와 함께 빠져나오는 제법 긴 검은 색의 면도칼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깊게 박혔다 빠져나왔는데도 은빛으로 반짝이는 면도날이 생각보다 날카롭게 빛을 낸다. 그와 함께 살을 가르며 나온 무언가를 말없이 휙-하고 바닥에 던지며 태원이 군홧발에 밟혀 바스러진다. ...뭐지? 해진이 눈을 찌푸렸다.

 

“.....황재오.”

 

격한 감정을 이기지 못 하고 씩씩거리는 재오를 보며 태원은 심유한 눈으로 조용히 상대하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눈가를 꿈틀이는 그를 보면 태원의 ‘..감정 조절 하라우.’하는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들려오는 것 같다.

 

“...너는- ─── 어떻게 생각하네?”

“...?!”

 

멈칫- 재오의 움직임이 급격히 속도가 떨어진다. 재오의 눈가가 꿈틀거리며 무슨 속셈이냐는 듯이 류환을 바라본다. 그 눈에서 한 점의 거짓을 찾기 위해.

 

-하고 멀어지는 해랑과 완우와의 간격을 보며 태원이 눈가를 꿈틀인다. 무슨 속셈인지 다 보여서 문제로군. 태원이 한숨처럼 혀를 차며 천천히 다시 한 번 장내를 훑었다. 벽에 기대 헐떡이는 시헌이 보인다. 무슨 생각인지 모를 녀석. 어느 새 대치상태가 된 류환과 재오도 알 수 없다. 재오의 실력은 류환보다 사격실력만 앞설 뿐 나머지는 전부 낮다. 어째서? 태원의 미간이 점차 일그러진다. 속셈은 보이는데 상황은 이해할 수 없다. 지금의 상황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도 네 술수냐, 지 진우. 깊게 침체한 태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은 잘 듣는구만, 기래.”

 

감각 없이 장내를 훑는 그 시선 하나 하나에 자신이 길러낸 아이들이 보인다. 짧게는 4년에서 길게는 10년이 넘게 자신이 하나에서 열까지 그 손 안간데 없이 길러낸 이들이었다. 그래, ‘길러냈다.’

 

썩을 놈의 꿈...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건가...’

 

마치 덧에 걸린 들짐승 같이 벗어나지를 못 하는구나. 태원은 쓰게 웃으며 턱-하고 벽에 등을 기댔다. 이 정도면... 보이리라.

 

서수혁이는 그늘에서 벗어났고,”

 

수혁의 눈이 커졌다. 황망하니 태원을 바라보는 검붉은 눈이 흔들렸다.

 

리해랑이는 시야가 넓어졌고,”

 

해랑이 눈가를 움찔이며 급하게 태원을 올려다본다. 그 봄이 완연한 눈이 딱딱- 노크하는 감에 불온함을 느끼고 만다.

 

리해진이는 원하는 것을 찾았고,”

 

해진은 움찔, 저도 모르게 류환과 해랑에게 시선을 주었다.

 

원류환이는 더 단단해졌고,”

 

류환이 침중해진 눈으로 잠시 태원을 보았다 금세 눈을 내리깐다. 그 눈이 격랑이 일 듯 떨렸다.

 

최완우는 이루고 싶은 것을 이뤘고,”

 

완우가 멈칫 해랑의 뒤에서 화들짝 놀란 듯 태원을 향해 고개를 든다.

 

박시헌이는 살아남을 힘을 길렀고,”

 

시헌이 고개를 들며 뭔 소리냐는 듯이 눈가를 찡그린다. 그러나 눈 안에 들어찬 감정이 이 중 그 누구보다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져 갔다.

 

황재오는 열등감에서 벗어났고,”

 

재오가 움찔 놀라며 류환과 대치하던 것도 잊고 태원을 돌아본다. 그 눈에 인 감정이 꽤나 복잡미묘했다. 방금 전 류환에게 들은 말이 귀에서 웅웅거린다.

 

아아- 내래만 맴돌고 있구만, 기래.”

 

한숨을 쉬었다. 태원은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북의 어렸을 적, 군에 들어오기 전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각박한 삶 속에서도 그 주위에서 죽어가는 군중들 사이에서 꿈을 가졌었다. 그 꿈이 자신의 손에 망가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 꿈은 여상하게도 계속 남아 그를 억지로나마 따라다녔다.

 

그래서... 원했었다.

 

태원의 든 눈에 보이는 7. 살아남기를 빌었다. 그래서 붉은 점 3개가 아직도 남아있을 때는 안심하면서도 솔직히 곤란했다.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왜 추적기를 빼지 않았을까. 타는 속은 점차 급박한 상황 속에 무뎌졌다. 태원은 느른한 숨을 내뱉었다.

 

“...내래는.”

 

천천히 들리는 눈은 언제인가 순임이 생각한 깊은 연륜이 묻어났다. 깊은 연륜... 그 말은 그 만큼 마모되고 부서져 깎여나간 세월을 말했다. 그 세월이 도저히 태원으로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숨을 조른다. 연륜이라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깊은 세월이 처참하다.

 

“-북의 개라서

 

태원의 느릇하게 말하는 말에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만다.

 

너희를 죽여야 되갔어.”

 

천천히 자세를 잡는 그 모습에 살기하나 없거늘 죽음이 느껴진다. 그 죽음이 누구의 죽음인지는 모르나 느껴지는 그 죽음이... 너무나 숨막힌다.

 

“..같이 죽기 시르면... 제대로 덤비라우.”

 

손에 쥔 면도칼을 접었다 핀 태원의 말에 재오가 허탈하게 숨을 뱉고 말았다.

 

 

 

 

 

그건 싫습네다.”

 

어느 새 온걸까. -하고 태원의 사각에서 소리 없이 접근한 시헌이 도검을 내리찍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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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내리찍던 도검이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에 날라간다. 시헌의 눈썹이 꿈틀- 위로 올라간다. 이건 또 뭔 일이래? 시헌은 힐끔- 자신의 행동에 아무런 반응 없는 태원을 보며 혀를 찼다. 옆에서 기겁하는 이들은 넘쳐나는데 정작 당사자는 멀쩡하다. 시헌은 자신의 손에서 날아간 가오리를 바라보며 천천히 날라온 총알의 방향을 힐끔 바라 보았다. 바로 태원이 기댄 콘크리트 난간 옆.

 

. 이건 또 뭐네?”

 

시헌이 눈가를 일그러트리자 급히 다가온 해진이 시헌을 향해 수도를 날리며 날카롭게 외친다.

 

무슨 짓입네까!”

뭐가 말이네?”

 

여상한 것을 묻는다는 듯 물어오는 시헌에 아연해진 것은 해진과 류환이었다. 해랑은 흘끔- 혀를 차는 재오와 인상을 찌푸리는 수혁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옆에 출혈로 기절한 완우를 보고는 한숨을 쉰 해랑이 다시 시헌을 보았다.

 

... 대좌님을 공격했냐고!”

“? 당연한 것 아녀? 죽기 싫으니까.”

 

여상하다는 듯 막힘없이 말하는 시헌에 재오가 한숨을 뱉었다. 박시헌이라는 인물은 그랬다. 최우선 순위가 생존만이 있는 그런 인물. 해랑과 북에서 부딫이며 겪게 되고 남으로 내려온 며칠 겪은 시헌은 재오마저 질리게한 그런 인물이었다.

 

태원은 어느 새 맞붙는 시헌과 해진을 보며 슬쩍 자신의 바로 목 근처까지 왔던 가오리를 보았다. 아마도 이 총알은.... 태원은 쓰게 웃었다. 자신의 숨겨둔 한 수라는 것은 아무래도 그것 역시 자신의 생각을 비껴나간 것 같았다. 태원은 멍하니 있는 류환에게 다가가 펴진 길다란 면도칼을 휘둘렀다.

 

!”

정신 차리라. 적지에서 누가 나태하게 있네?”

 

느릿하면서도 낮은 목소리에 옆구리가 갈린 류환이 놀라며 반사적으로 쥐고있는 기억 모양의 가오리를 휘두른다. 태원은 류환의 옆구리가 갈리면서 튀어나온 금속물질을 군화 앞코로 찍으며 쥐고 있는 면도칼을 접으며 류환의 가오리 날을 잡았다. 그리고 올려차는 무릎을 간신히 팔뚝으로 막았으나 맹렬히 날아오는 주먹에 결국 콘크리트 기둥에 등을 박고는 헐떡인다. 그런 류환을 잠시 바라본 태원이 이네 자신을 향해 가오리를 찔러오는 해랑을 잡아챘다. 이렇게 안 해도 될테지만... 이러고 싶다. 허튼 짓이라는 것을 알지만.... 해주고 싶다.

태원의 눈이 이상하리만치 잔잔하다.

 

동작이 큰 공격은 하지 말랬지.”

 

-하고 쑤시는 면도칼이 생각보다 빨라 해랑은 아스라하게 눈가를 찌푸린다.

애초에 불리한 싸움이었다. 한 쪽은 죽이려들고, 한 쪽은.... 해랑은 이내 잡힌 팔에 힘을 줘 마찬가지로 태원의 팔을 잡았다. 움칫- 멈춘 태원은 이내 자신의 뒤에서 수도를 날리는 수혁을 느끼며 숨을 들이켜 근육을 긴장시켰다. -하고 비스듬히 트는 몸에 볼 위에 상흔을 내며 느끼며 쩍-하고 해랑의 상처를 열며 빠져나온 면도칼에 또 다시 핏묻은 금속이 딸려 떨어진다. 빼낸 피묻은 면도칼이 그대로 반쯤 자신과 몸이 붙은 수혁의 복부를 가른다. 스윽-하고 가르는 면도칼에 걸리는 느낌이 없다. 태원은 그 느낌에 금새 그네들 사이에서 빠져나오며 파각-하고 해랑의 몸에서 나온 금속을 짓밟았다.

 

뒤로 두어 발자국. 그 발걸음으로 떨어진 간격이 생각보다 멀다. 수혁이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찔린 곳을 보았다. 눈을 껌뻑이던 수혁이 화들짝 고개를 든다. 기묘한 불안감이 언습한다.

 

“....후우. 늙긴 늙었군.”

 

-하고 다시 자신의 사각을 노리는 시헌의 배를 가른 태원이 혀를 찼다. 시헌의 배에서 툭-하고 튀어나온 칩을 손으로 잡아 빼자 나지막한 신음을 흘리며 황급히 시헌이 뒤로 물러선다. 시헌에게 기습이 아니고서는 태원에게 이길 승률은 없었다.

태원은 그런 시헌을 잠시 보았다. 북의 정부가 가장 원하는 능력을 가진 괴물에 가장 근접하게 완성된 것은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아닌 시헌이었다. 생존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라도 쓸 차게 벼려진 그 무심에 가까운 금속과도 비슷한 날붙이 같은 정신. 자기 가족조차 아무렇지 않게 잘라낼 수 있는 비정함. 그러나 기회를 노치지 않고 복수를 해올 그 독심. 아마도 어디에 떨궈놔도 잘 살 것 같은 바퀴벌레... 태원은 조심히 떠오르는 진우의 얼굴에 눈을 깜빡여 신경을 가다듬었다. 산만한 놈. 혀를 차며 류환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혼란한 재오에게 몇 발자국만에 다가간다. 그 혼란한 눈을 보며 푹-하고 찔러버리자 급격히 눈이 커진다.

 

“.....대좌?”

“...자라.”

 

그 말을 끝으로 거뭇해지는 시야에 쓰러지는 신음 흘리는 재오를 놔두며 숨을 돌린다. 자신의 발 아래로 떨어진 금속을 마지막으로 밟아버린다. 와그작-하고 발아래 박살나는 칩이 깔짝거리던 신경을 느슨하게 만든다.

다시 한 번 찾아온 대치에 태원을 뺀 다른 이들은 의문을 가지고 만다. 자신들을 죽인다하는 태원의 행동은 여상했다.

 

.... 날씨 좋군.”

 

-하고 난간에 기댄 태원이 뿌득-하고 밟히는 철제들을 치우며 콘크리트 더미 난간에 섰다. 칙칙한 하늘이 꼭 그가 전에살았던 도시와 북의 황폐한 민둥산들을 떠오르게 했다.

 

, 내가 가르친 거 기억은 하네?”

 

느슨한 목소리에 시헌이 꼼질거리며 뒷머리를 박박 긁는다. 특유의 고민할 때 행동이었다. 시헌이 마치 눈치라도 보듯이 그네들을 보더니 결국 가장 먼저 말한다.

 

, 죽지 말라는거 아닙네까?”

 

그 말에 그네들이 더 놀라고 만다. 태원이 안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않았다. 비식-하고 나오는 웃음이 그리 시원할 수 없다.

분명, 이 중 자신이 가르친 것을 가장 잘 지키는 이는 시헌이었다.

 

기래, 내래 죽디말라 했었디.”

 

일견 평온하기까지 한 얼굴에 수혁이 사색이 되었다. 뭐라 한 마디라도 하고 싶은데, 터지지 않는 입이 답답하다. 뭐라.. 뭐라 말해야 할까?

 

내래는 그리 가르친 적 없어야. 자결 명령이 내려왔어도 그리 쉽게 죽어야 쓰갔어?”

 

마치, 벽에다 대고 말하는 것 같은 태원의 태도에 류환이 멈칫멈칫 몸을 움직이려 한다. 그러나 차마... 차마 그 뒤로 있는 난간에 움직이기조차 여의치 않다.

 

아아- 정말 좋은 날씨야.”

 

얼굴 위로 떨어지는 비에 태원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꽤나 긴 여정이었다. 다시 태어난 그 순간부터 휴식은 없었다. 죽기 싫다면 혹여 옆 이웃이라도 의심해야 했고, 식구들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구정물이라도 핥아야 했으며, 그 날 끼니를 굶지 않으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다. 숨막힐 정도로 그가 살아온 인생은 헛되었다는 듯이 압박하는 그 삶이 숨 가팠다.

 

죽기에는.”

 

속삭이듯이 말하는 말이 마치 천둥처럼 들려왔다.

태원은 탁-하고 자신의 미간에 닿는 총구멍이 꽤나 차다. 총구멍을 들이미는 순간에도 이상한 생각이 난다. 아아- 애들 앞에서는 꽤나 안 좋은데... 하는 그런... 눈이 커져 무작정 뛰어오는 해랑이 보였다. 옆구리를 잡고 기겁하는 해진도 보인다. 류환이 주변에 물건을 잡아던지려는 모습도 보였다. 수혁이 무전기로 뭐라 하는 모습도 보인다. 시헌의 커진 눈을 마지막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

-!

 

들린 총소리는 둘.

넘어가는 몸을 느끼며 태원은 조금 웃고야 말았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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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가지고 싶었던 미래

 

잃고 말았지만, 다시 찾겠습니다.

-리 해진

 

리 해진이 어렸을 적. 그래, 아주 어렸을 적에 한 가지 꿈을 가지고 있었다. 아주 단순하고도 단순한 꿈이었다.

 

우리 가족이 굶지 않는 것.’

 

아주... 아주 조금만 땅을 내려가면 볼 수 있는 그 광경이 해진에게는 꿈이었다.

어린 동생들과 어미가 하루 배 곪지 않고 배불리 먹는 그런 모습. 그것이 해진의 첫 꿈이었다. 그 꿈은 해진이 5446부대에 입대하는 순간 보지 못 하고 이루었다 믿게 된 꿈이었다.

 

그리고 해진은 5446부대에서, 그 지옥에서 또 다른 꿈을 꾸게 되었다.

 

원 류환그게 해진의 꿈이었다.

일주일 중 쉴 수 있던 단 몇 시간조차 훈련에 투자하는 그가 해진의 꿈이었다.

 

그 꿈이 리 해진이라는 어리고 어렸던 훈련병이라는 직책을 진 꼬마를 그 지옥 속에서 살아 숨쉬게 했다. 살아서 그 꿈같은 악몽을 지나오게 했다. 그 죽고 죽이는 원 속에서 살아남게 해줬다.

 

해진에게 원 류환은 꿈이었다.

그런 꿈이 남으로 내려갔을 때. 아주 잠시의 시간을 차로 얼굴조차 보지 못 하고 내려보냈을 때 해진을 잡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해진은 그 날 처음으로 이 아닌 미래가 가지고 싶었다.

 

배고프지 않는 우리 가족을 보는 게 아니라

그 앞서가는 든든한 등을 따라잡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잠깐... 아주 잠깐 자신의 어깨를 내준 김 태원이라는 사람과 함께 있는 미래를 상상했다. 그 어깨는 매우 단단했고 강했으며 굳건했다. 그래서... 기댈 수 있었기에 함께 할 미래를 잠시 떠올렸다.

 

그리고 남에 내려와... 그 미래가 앞에 닥쳤을 때... 실은 해진은 무서웠다.

해진의 짧은 인생 중 2. 어린 나이에 가족과 이별했고, 금방 볼 수 있다 생각했던 류환과도 헤어졌다. ‘과의 이별을 겪은 해진은 실은 무서웠다. 미래도 금방 멀어질까?하고 무서웠었다.

 

그리고 그 나날이 지나갈 때.

해진은 또 하나의 미래를 가지고 싶었다.

이 아닌 미래를 가지고 싶었다.

 

자신의 소중한... 그래, 소중하고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있는, 함께 존재하는, 그저 이렇게 하루 평범하게 하루 웃으며 함께 있을 수 있는 그런 나날을 꿈꿨다.

 

“......”

 

해진은 천천히 얼굴을 부볐다. 거칠한 피부가 거슬린다. 까칠한 입술과 조금 마른 얼굴이 손바닥 아래로 느껴졌다.

 

그건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찾아왔다.

대좌의 귀환, 자살명령, 5446부대의 비밀. 그 모든 것은 머피의 법칙처럼 찬찬히 차곡차곡 쌓여서 왔다.

 

자신의 첫 꿈이었던 배 곪지 않는 가족은 자신이 5446부대에 들어가는 순간 죽었다. 그러나 단 하나가 남아있다.

자신의 둘째 꿈이었던 류환 조장님은 지금은 같은 조장이 되었으나 옆에 계신다. 설령, 조국을 배신한 것이 되었어도.

 

그러면 미래?

해진은 코끝에 느껴지는 알싸한 알코올 내에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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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해지는 방법을 알았다.

-원 류환

 

류환에게는 어렸을 적. 그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가 전부였다.

 

단 한 분뿐인 당신의 가족. 나의 가족. 나의 어머니.

 

그렇기에 류환에게는 어머니만이 가장, 가장 소중했다. 그 무엇보다도, 옆 집 누군가 소중하다던 꿀단지보다저 건너 집 어르신의 바보상자보다그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렇기에 어머니가 더 이상 고생하시지 않고, 배고프시지 않고, 자신 때문에 고민하시지 않는다면. 그걸로 류환은 충분했다. 그렇기에 류환은 아무런 걱정, 근심도 두려움도 미련도 없이 5446부대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만약, 있다면 하나.

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근심뿐. 그 외에는 아무런 방해물도 없었다.

 

그렇기에 류환에게 자신에게 어머니를 먹여 살릴, 이 어린 나이에도 기회를 준 조국은 감히 이루 말할 때 없는 은인이었으며, 어머니와 동급이 되버린 소중한 것이었다. 그것이 설령 거짓이라 할지라도.

 

류환이 5446부대에 들어갔을 적.

류환은 그 누구에게도 정을 주지 않았다. 자신은 살아남아야했다. 그래야 어머니에게 고기 한 점, 쌀 한 되, 나물 한 주먹 더 갈테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고 올라야 했다. 그네들이 책임지고 있을 그 가족들과 함께 짓밟고 올라야만 했다.

 

그렇게 자신을 죽이고 남을 죽이고 마지막 남은 무언가를 죽이려 할 때 당신을 만났다.

그 때까지 류환에게 전부였던과거, 현재, 미래 그 모든 것이었던 어머니를 재치고 당신을 만났다.

 

김 태원 총교관 대좌 동지

 

길기도 한 당신을 만났을 때 실은 무서웠다.

당신한테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아 무서웠다. 내 어미를 지키지 못 한체 죽을 것 같아 두려웠다. 감히 당신 앞에서 나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런 자신에게 당신은 말했었다.

 

죽기를 무서워하지 마라.’

 

그리 말했다. 그러면서도 살으라, 악착같이 살으라 그리 세뇌하듯이 말했다.

그렇기에 산 게 아닐까? 류환은 조심스레 생각하고는 했다. 어머니라는 버팀목이 있었으나 결국 자신은 당신의 그 말로 산게 아닐까하고 생각하고는 만다.

 

류환에게 태원은 이상한, 이해할 수 없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무섭다가도 다가와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자신의 문제를 지적하면서도 잘 했다 말해온다. 영창감일 문제인데 그저 훈계만 주며 넘어간다.

간간히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온다.

 

무얼까-

무얼까?

 

그리고 어느 가랑비에 옷 젖어들 듯이 자신은 류환은 태원의 그 알 수 없는 눈빛에 행동에 소리없는 마음에 젖어들어 갔다.

 

그렇기에-

그렇기에.

 

류환은 태원과 함께 한 그 남의 몇 달.

그 짧은 몇 달을 미래로 그렸다.

 

그리고 그 미래를 잡기 위해 그 바라마지않던 조국과 어머니를 저버렸다.

 

하아

 

내쉬는 숨에 가슴뼈가 아파온다.

류환에게 가지고 싶었던 미래는 두 가지였다.

 

어머니가 있는 미래.

조국의 전설이 된 미래.

 

가지고 싶었던 미래.

그러나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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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내 곁에는 이 미래뿐이었다.

그걸 조금 늦게 알고 말았을 뿐.

-리 해랑

 

해랑에게는 언제나 한 가지 미래만이 있었다.

 

김 태원

 

그게 해랑의 미래였다.

단지, 그 미래가 애매했을 뿐.

 

어렸었던 해랑의 눈에도 태원은 언제나 이상했다. 어렸을 적의 자신과 있었을 때에는 그 심유한 눈, 단 한 번도 보지 못 할 그 깊이의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본다. 그 눈이 아렸다.

그리고 조금 더 컸을 때에는 잔걱정이 담겨져 왔다. 잔잔하니 무엇이 담겨져있는지 알 수 없는 걱정을 한아름 앉고 자신을 보아왔다. 그 눈이 참으로 좋았다.

좀 더, 좀 더 컷을 때 그 깊디 깊은 눈에는..... 뭐가 담겼더라? 해랑은 커가면 커갈수록 알 수 없었던 눈을 떠올린다.

 

겨우 사람의 눈동자. 그 깊이래봤자 5cm될까? 그런데도 당신의 눈을 보고나면 무심코 아- 눈이 깊다는 건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닿고 만다.

당신의 눈은 그런 눈이었다.

 

그래서 해랑은, 자신은 그 너무 깊었던 눈처럼 자신의 미래를 감히 가늠하지 못 했던 걸까?

그저... 그저 어렴풋이 당신이 옆에 있는 미래를 바랬었다.

 

사춘기마냥 자그마한 욕심으로 당신에게 투정부리듯 돌아간 제 어미를 찾듯 날뛰면서도 자신은 바래왔었다.

 

그 어린 날의 폭신한 계란말이처럼.

그 어렸을 적의 깨끗한 붕대처럼.

그 어리숙했던 시절의 상흔처럼.

 

당신이 함께 할거라-

그리 거짓없는 믿음으로 바래왔다.

 

 

그 미래를 먼저 깬 것은 다름 아닌 해랑, 자신이었다.

 

해랑은 자신의 그 미래에 어느 순간 저만의미래를 꿈꿨다.

어미가 있는, 동료가 있는, 친구가 있는 그 미래에 태원은 흑백사진처럼 흐릿하게 저 멀리에 존재했다. 왜 그랬을까? 당신의 교관으로서의 모습에 상처받아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어서? 어른이 된 모습을 알려주고 싶어서?

 

왜 그랬을까?

 

... 남으로 혼자 내려왔을까?

 

해랑은 눈을 감았다.

천천히 감긴 눈에 우습게도 남으로 내려온 태원을 보며 기뻐한 자신이 그려졌다.

 

해랑은 다시 찾았다.

가지고 싶었던 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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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발자국.

그 한 발자국으로 그늘에서 벗어났다.

 

내 등을 민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서 수혁

 

수혁에게 미래라는 것은 없었다.

그저 달리고 달릴 뿐이었다.

 

커다란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 그 그늘을 이해하기 위해 달렸다. 그 그늘이 왜 여기까지 왔을까, 그 그늘이 왜 이렇게 시커멀까, 그 그늘이 왜 흐려졌을까- 그렇게 그렇게 수혁은 자신에게 묻고 삶에 묻고 결국에는 당신, ‘김 태원에게 물었다.

 

언제나 이해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수혁에게 미래란 아비를 이해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그게, 미래라고 칭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

 

그렇기에 수혁은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바래왔을 지도 모른다.

이 그늘을 벗어나는 미래를.

 

그 미래에 수혁은 실은 태원을 죽이면 끝이 나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다.

당신을 잡으면 자신은 아비의 복수와 함께 그 그늘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그늘에서 벗어나리라-고 그저 추상적으로 생각했다.

 

수혁은 목을 죄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후우

 

뱉어지는 숨이 무겁다.

수혁에게 미래는 언제나 이 숨처럼 무거웠다.

때어낼 수 없는 무언가처럼, 발끝을 따라다니는 그림자처럼, 멈출 수 없는 심장고동처럼 무거웠다.

 

어미가 죽었을 때는 어땠더라? 아비가 죽었을 때는?

아마 이보다는 무겁지 않았으리라-

 

수혁은 태원을 만났을 때부터 언제나 고민했다. 자신이 맞는 길을 걷는 것인가. 이 길이 맞는 길인가. 이대로도 괜찮을 걸까. 당신의 그 눈에 난 상흔을 볼 때면 그 날 밤이 떠올라 수혁은 과거이자 미래에 가쳐버리고 만다.

 

그래서.

어느 날.

 

괜히 바라고 만 미래가 있었다.

 

그건 아마도.... 당신이 옥상에서 쉬고 있는 모습을, 어느 날 같이 높은 건물 위가 아닌 낮은 건물 옥상에서 훈련장을 바라보는 그 얼굴을 보며... 무심코 바라고 말았던 미래가 아닐까 한다.

 

그 얼굴은 괜시리 어두웠었던 것 같았다.

 

마치, 그래- 그 날 밤 당신이 내 눈을 가려주었던 것처럼 당신의 눈을 가려주고 싶을 정도로 어두워서.... 왠지 아스라이 사라질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당신의 눈을 가려주는... 그런 미래를 무심코 당신처럼 그 눈을 가려주는 미래를 떠올렸다.

 

그 미래가 당신이 내려와 있는 몇 달의 마지막.

정말로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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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이루고 싶었던 것

 

당신이 내 전부였다.

-김 은빈

 

금강조 부조장.

김 은빈. 나이 27(추측). 출신지 알 수 없음.

기타 사항. 김 태원 대좌가 데려옴.

 

“....”

 

눈을 부비벼 일어난 은빈은 자연스레 태원을 본다.

하얀 붕대, 늘어진 링거, 흰 바탕에 푸른 줄무늬의 환자복, 싸한 알코올과 약내

 

미동하지 않는 몸.

 

“........”

 

조심스레 은빈은 손을 올렸다. 그러나 닿기도 전에 다시 천천히 내려 침대 가상이만을 잡고 그 위에 고개를 올린다.

 

그 날이 있은지 어언 한 달.

태원은 아직도 눈을 뜨지 않는다.

 

깜빡이는 눈이 뻑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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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은빈이라는 개체에게 태원은 뭐랄까... 은인? 아니, 그보다도 높은그래. 구원이었다.

 

김 은빈의 첫 기억은 더러운 회색 벽과 금방 죽을 것 같은 누더기를 입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인민들로 시작한다.

몇 번이나 덧칠한 것 같은 회색 벽은 고약한 냄새가 났고, 한 쪽에 있는 화장실은 더욱 질식할 것 같이 더러웠다. 바로 옆에 있는 이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이 삐쩍 말라 있었으며, 사람 같지 않은 눈으로 벽 구석을 본다던가 온 몸에 투둑거리는 이를 털어내고 있었다. 위생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그곳에서 은빈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니, 은빈-이라고 불릴 그것은 그곳에서 살았다.

많은 것을 알지는 못 한다. 은빈은 그저 자신의 부모-라고 할 수 있는 그녀가 기독교였다는 이유로 수용소라고 불린 이곳에 들어왔고, 그 중 우연찮게도 자신을 가지게 된 어미가 발악처럼 낳았다고 한다. 아니, 그 반대였던가? 은빈은 고개를 기웃거렸다. 볼에 부벼지는 하얀 시트가 조금 구깃해진다. 중요하지 않다. 어미라 불릴 그녀가 자신을 낳기 싫어했기에 나았는지, 그도 아니면 반항하기 위해 나았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 씨가 누구의 것인지도 중요치 않다. 은빈에게 그들은 이미 자신이 김 은빈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는 순간 죽은 이들이었다.

 

지금은 은빈의 기억 속에 수용소 시절의 기억은 묻히고 묻혀있다. 이제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뇌리에 박혀 있던 그 쓰레기는 마치, 말끔하게 청소한 듯이 산뜻하게 포장되어 망각의 늪 위에 빼꼼- 빙산의 일각처럼 간간히 그 모습을 보일 뿐이었다.

 

김태원은 은빈의 구원이다.

그가은빈을 그 지옥인지도 몰랐어야 했을 지옥에서 끄집어내주었다.

 

은빈은 어렴풋이 짐작한다. 태원은 자신과 같다.

무엇이 같냐면... 그래, ‘그것이 같을 것이다.

 

‘...전생.’

 

그러하다. 은빈은 첫 기억을 떠올리는, 사고를 할 수 있는 순간의 물밀듯 밀려온 기억들을 기억한다. 수용소의 그네들이 짐승이라 그리 세뇌하듯 말할 때 부상하여 미약한 반항을 하던 그 전생이라는 것을 기억한다. 전생의 얼굴도 가족도 이름도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얼핏 그런 일이 있던 것 같다-하는 기억은 있다. 그 기억이 은빈이 되기 전의 그것에게 수용소가 지옥임을 알려주었다.

 

사람이 사람이 아닌 가축보다 못 한 짐승이 되어 네모난 건물 모양을 한 쓰레기통 안에서 하루에도 몇 명씩 죽어나가고 들어온다. 그곳은 인간을 짐승으로, 쓰레기로 만들어 태우는 정치인들의 소각장이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살고 싶네?’

 

금방이라도 마지막 숨을 토하고 죽을 것 같은 눈을 한 남자가 삐쩍 마른 그것이었던 자신에게 물어온다. 자신은 그 남자에게서 나는 매캐한 담배냄새와 같이 풍기는 알콜내, 그리고... 맛있는 음식의 전생의 기억에만 잔재한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처럼 물밀듯 치고 올라오는 식욕과 생존욕구에 내밀어진 그 검은 장갑이 뒤덮인 손을 급박하게 잡았다.

 

은빈은 여전히 모른다.

그 날, 태원이 어떤 이유로 자신을 그 지옥에서 빼냈는지.

 

은빈은 여전히 모른다.

그 날, 태원이 어떤 이유로 자신에게 이름을 주었는지.

 

은빈은 여전히 모른다.

그 날, 태원이 어떤 이유로 자신을 빼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아니, 알지 못 한다.

그저 기묘한 동질감과 이질적인 살아있는 눈과 흐릿한 초점의 죽음이 쌓인 상처를 알 뿐이었다.

 

은빈은 그 손을 잡고 5446부대에 들어갔다.

행복했다.

 

아무런 생각, 그래- 괜한 생각으로 수용소에서처럼 자신이 있는 곳을 지옥으로 만들 필요도 없었으며, 조금만 견디고 노력하면 먹을 것이 나오고, 편히 잘 수 있다. 깨끗한 위생에서 몸을 뉘일 수도 있고, 짐승보다 못 한 쓰레기 취급도 당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을 끌어올린 태원이 이루어준 것.

 

은빈은 그렇게 생각하기에 전생의 기억’-민주주의라는 자유조차 묻어버리며 태원을 맹목적으로 따랐다.

 

그렇다.

은빈이, 김 은빈이라는 개체가 된 자신이 따른 것은 나라라는 조국도, 5446부대를 만들어준 리무혁 대장도, 밥을 먹게 지원해주는 윗사람들도 아닌 오로지 김태원이라는 남자뿐이었다. 은빈은 맹목했다. 그 명령에 이루지 못 하는 것 없으며 필요하다면 살인도 서슴치않고, 현재를 지옥으로 만드는 전생조차 꺼낼 만큼 맹목했다.

 

이유는 단 하나.

기묘한 동질감이 낳은 그 언제까지라도 함께-라는 그 감각.

 

그래서 언제까지-라는 것을 이룰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맹목할 수 없었다.

 

자살 명령이 내려오기 전.... 은빈이 남으로 내려오기 전.... 은빈이 태원에게 받은 명령은 하나였다.

 

죽디 말라. 살아 남으라.....’

 

 

 

끝까지.’

 

그렇기에.

은빈은 내려온 자살 명령을 조용히 보류했다.

 

혹여, 그 자살명령조차 태원이 내린 건 아닐까- 자신이 살아있다는 흔적을 칩으로 알리며 숨죽여 움직였다. 태원에게 명령-이라는 것을 받아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더더욱 지키고 싶었다.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대면한 태원에게 받은 명령은.....

 

“......”

 

은빈은 자신의 왼손을 쥐락펴락하며 쳐다보았다.

아직도 저격총을 쥐고 있던 그 감각이 남아있는 것 같았다.

 

태원의.

머리에.

겨눠진.

 

총을 보는 순간.

은빈은 갈등했다.

 

태원이 내린 명령은 하나.

자신이 ‘5446부대가 살아있다는 흔적을 말소하기 전까지 그 누구도 방해하지 못 하게 지원하라는 것. 그렇기에 은빈은 고민해야 했다. 태원이 스스로의 머리에 겨누는 총. 태원의 명령은 이수했다. 자리를 떠야했다. 그러나 뜰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앞에 펼쳐진 태원이 스스로에게 겨눈 총에 저도 모르게 자세를 다시 잡으며 저격용 라이플을 겨눴다.

 

[

-

 

은빈은 숨을 헐떡였다.

어떻게 된 거지? 은빈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라이플을 집어던지며 기듯이 일어나 태원이 넘어간 그 건물 아래로 달렸다. 가는 중 왠 탈북민과 국정원 몇을 만났던 것도 같다. 건물 위에 있으며 치웠던 이들과는 다른 이들이었다. 그들의 소란을 무시하며 달려간 그곳에 피가 흥건한 가 쓸어져있었다.

 

...- ?”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감정이 온통 뒤섞여서 은빈의 머리를 멍하니 만든다. 전생의 무언가가 자신을 두드린다.

 

결핍되어 있던 은빈의 안을 처음 느끼는, 아니- 은빈의 전생은 느꼈을 그 감각이 쾅쾅!하고 소란스레 두드려온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상처를 지혈한다. 위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성가시다.

 

흐으- 하아.....”

 

깊게 심호흡을 하며 다시 살펴보는 태원의 몸은 이곳저곳 상처가 나 있었다.

 

머리.. 머리는?’

 

하는 생각에 다달았을 때 마침 저 위에서 내려오는 그네들이 보인다.

그리고....

 

-”]

 

은빈은 태원의 옅게 샌 고동색의 머리카락을 스륵- 넘겼다.

하얀 붕대가 감겨진 머리.

 

그러나 그 안은 그리 심각지 않은 조금의 뇌진탕과 찢긴 상처들뿐이다.

 

 

 

 

은빈의 라이플은 정확히 태원이 쥔 총신을 맞췄다.

은빈은 처음으로 맹목이 아닌 자의로서 이루고 싶었던 것에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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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고 싶었다.

-황 재오

 

황 재오.

그는 5남매가 넘는 형제자매를 둔 집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있었던 것 같았다. 그의 어릴 적의 짧은 기억에는 분명히 아비라 할 수 있던 이가 있었다. 물론, 그 아비가 언제나 옆 집, 이웃을 감시하며 연자제로 잡혀갈까 가시를 세우고 이웃을 감시하며 혹여 그럴 낌새가 보이거나 모양을 보게 되면 즉각에 고해 받쳤다.

 

아비가 고해 받치는 날이면 언제나 아비가 술에 취해 집으로 들어와 고성방가를 한다. 재오의 기억 속의 아비는 연자제로 잡혀갈까 전전긍긍하면서도 호시탐탐 남을 고자질할 꿍꿍이 가득한 술주정뱅이였다.

 

그런 아비는 다른 이의 고자질로 질질 탄광으로 끌려갔다. 남매 중 나이가 많던 윗 형제와 남매도 같이 끌려가는 것으로 가족은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그 마을 자체가 그랬던 것 같았다. 언제나 누군가 고자질할까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그런 곳. 재오가 살던 북의 마을은 그랬다.

그 영향이었을까, 재오의 남매도 다르지는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헐뜯으며 무언가 하나 더 먹으려 악착같았고, 누군가 더 먹는다면 으르렁거리기 일쑤였다. 그런 중의 어미는 언제나 피곤에 쩌든 얼굴이었고, 기운 없었으며,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어미라도 그나마 재오에게 어미만이 가족-이라는 정을 느끼게 했다.

 

재오는 질투가 강한 아이였다.

위의 남매들을 질투했다. 그 힘만 있으면 자신도 밥 한 숟가락 더 뜰 수 있었을 텐데! 조금만 더 컸으면 나가서 일할 수 있었을 텐데! 좀 더 컸었더라면! 아래의 남매들을 질투했다. 어리면 좀 더 어리광을 부릴 수 있었을 텐데! 어미의 사랑을 좀 더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좀 더 관심을 받았을 텐데!

 

그 질투가 열등감으로 변하는건 그리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질투가 황재오라는 인간을 살도록 한 요소라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질투란 삶을 향한 원동력이었고, 좀 더 높은 것에 다다르게 하는 촉발제였고, 원하는 것을 움켜쥐게 해주는 이유였다.

그것이 도를 지나쳤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재오가 5446부대에 들어가게 된 것은 어미가 죽고 나서였다.

겨우겨우 어미를 중심으로 뭉쳐있던 남매들은 어미가 과로와 굶주림에 죽자 순식간에 뿔뿔히 흩어졌다. 어린 동생들만 냉큼 서로서로에게 떠맞기려 들었던 그네들 사이에서 가운데 있던 재오만이 동떨어진 듯이 튕겨나와 있었다. 그런 재오가 5446부대에 대해 듣고 들어간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처음 5446부대에 들어간 재오는 나름 흡족했다. 제가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데서 나오는 위의 남매들에게 느꼈던 열등감의 해소와 희열, 그리고 뿌듣함. 그러나 그 감각은 잠깐이었다. 재오는 힘든 훈련과 높은 벽을 마주해야 했다.

 

훈련은 지독했고, 재오와 같이 있는 이들은 하나같이 비등했다. 바로 위의 3군이나 2군만 해도 강하기 그지없어 과연 올라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재오는 그 많던 남매들 사이에서처럼 포기보다 그들을 먼저 질투했다.

 

그들의 강함을 질투했다.

그들의 먹는 밥을 질투했다.

그들의 능력을 질투했다

 

위에 있는 녀석을 하나하나 쓸어트리며 올라온 재오의 눈에 아무 노력 없이 올라온 것 같은 해랑은 눈엣가시인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뭘 노려보네?”

“....내 새끼 머리꼬라지 참 간나같구만, 기래.”

- 이게 바로 남조선 유행인기야. 모르네?”

 

앞에서 깐죽거리는 해랑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조금 누그러진 것이 지금이라는 것을 알까. 재오는 으르렁거리며 노란 머리의 해랑을 노려보았다. ‘그 일이 있고 몇 주된 얼굴은 까칠해져 말랐다.

 

그러고 보면 그랬다. 해랑은 5446부대 그 누구보다도 대좌에게 달라붙어있던 이였다.

문득, 그 사실을 떠올린 재오의 얼굴이 다시 와작와작 일그러진다. 그 모습을 보며 해랑이 다시 낄낄거린다. 그 모습에 힘이 안 들어간건 재오나 해랑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서로가 서로에게 얕잡히기 싫어 평소와 다를 바 없다는 듯이 굴 뿐. 해랑이나 재오나 지친 것은 매한가지였다.

 

해랑은... 그랬다. 오르고 오른 재오에게 언제나 원류환과는 다른 열등감을 주었다. 재오는 이해할 수 없던 그런 열등감을 해랑은 깨달게 했다.

재오는 눈가를 일그러트리며 벽에 기대었다. 하얀 남조선 병원의 복도 저 끄트머리에 있는 문 너머. 거기에 있다.

 

[“...잘 했다.”

 

재오는 머리 위에 턱- 하니 올려진 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슥슥-하고 짧은 머리를 흐트린 손이 어느 새 멀어진다.

황급히 돌린 시선에 등 돌린 총교관이 보인다. 군녹색의 군복의 등을 멀거니 보다 까슬한 머리 끝을 매만져보고 만다. 이건... 뭐지? 재오는 난생 처음 겪는 부류의 것에 황망하니 잡고 있던 총을 몇 번이고 만지작거리고야 만다.

 

그러고도 몇 번인가 그의 말없는 쓰다듬이나 눈, 소리 없는 어깨의 토닥임을 받고야 깨달았다. , 이게 칭찬이라는 거네? 그제야 얼굴을 마른세수하며 매만진 재오의 귀가 붉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재오는 간간히 총교관에게 시선을 주고 말았다. 그의 등, 매마른 등을 한없이 보고는 했다. 질투와는 다른... 처음 느끼는 그 감정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그렇기에 가끔 해랑이 총교관에게 달라붙으면 그날은 꼭 해랑과 틀어지고는 말았다. 원채에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더더욱이나 싫은 녀석이었다.

 

태원이 내려간 몇 달.

재오는 늘 습관처럼 까슬한 머리 끝을 매만졌다. 해랑 그 녀석이 사라지니 답답하던 속이 뚫린 것 같았거늘... 하고 얇은 앓는 소리를 낸 재오가 혀를 찬다. 짜증스런 그의 기분에 그 날의 백두조는 앓는 소리를 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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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오는 안절부절했다.

올라온 총교관의 낯이 칙칙했다.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그 얼굴을 보며 재오는 짜증스레 완우를 향해 으르렁대었다. 그 날 완우는 웬일로 자신에게 으르렁대는 재오에 쩔쩔맸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재오는 총교관과 함께 남으로 내려왔다.

 

“.........”

 

재오는 불퉁하게 자신의 손에 들린 총을 만지작거렸다. 짜증나는 리해랑이가 결국 일을 쳤다. 생각도 못 했던 원류환도 배반했다고 한다. 이건 좀 충격이군. 재오가 찡그려지는 인상을 느끼며 또 다른 이... 서수혁을 떠올렸다. 자신의 전대. 그에 책임감을 느낀다. 질투했던 이의 배신이랄까- 아니, 그보다는 적대감과 함께 이는 짜증스러움.

-하고 혀를 찬 재오는 출정 준비를 했다.

 

아쉽게도 덧을 놓을 시간도 기회도 없었다.

재오의 곁에는 어쩐 일인지 계속 태원이나 완우가 붙어있었으니까. 아깝게 되었구만, -. 속으로 아쉬운 말을 내뱉으며 일어난 재오는 그 때까지도 별 걱정이 없었다.

 

“...?!”

 

재오는 눈가를 꿈틀거리며 앞의 류환을 보았다. 이 간나새끼가 뭐라는거네?!?? 속으로 터져나오는 욕을 지껄이면서도 석연찮은 기색을 버릴 수 없었다.

 

‘...너는- 대좌님이 버림받았다는 것에 어떻게 생각하네?’

 

그 말에 눈가가 급히 찌푸려질 수밖에. 재오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시헌처럼 잔머리가 좋지도 해랑처럼 감이 뛰어나지도 해진처럼 똑똑하지도 않지만 눈먼 질투로 위아래 없이 달려야 했던 재오에게 딱 하나, 그들보다 경쟁에 관한 감이 남달랐다. 그건 아마도 많은 남매들 사이에서 커 그렇지 않을까? 그런 재오는 흘끔- 태원을 보았다.

이상하기는 하다. 이렇게 날뛰는데 남에서는 아무 조치도 없는가? 북에서는 무슨 생각으로 보냈을까? 버림, 경쟁이란 것에서 박탈당하다 듯 내쫒기는 것이 대좌에게 가당키나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전에 남에서 내내 어둔 색의 태원의 낯이 떠오른다.

 

그와 동시에 들려오는 소리가 그의 뇌 속을 짜증스레 헝클 만큼 혼란스러우리만치 담담하다.

 

황재오는 열등감에서 벗어났고,”

 

눈을 크게 뜨는 자신의 머리 한 쪽을 박박 긁는 것 같은 감각. 재오가 그 정처없는 엉크러진 감정이라고 해야 할지 감각이라 해야 할지 모를 것들을 정리하기도 전에 들려왔다.

 

“...내래는. -북의 개라서. 너희를 죽여야 되갔어.”

 

그 한숨 같은. 마지막 숨 같은. 마지막 불꽃 같은.

말이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나빴다. 분명, 자랑스런 혁명전사거늘.... 재오가 일그러지는, 감정을 수습할 시간도 없었다. 어디서 나온지 모를 시헌이 가오리를 쥔 채 태원의 등 뒤를 찌르고 있었다.

 

“?!?!!”

 

급하게 숨을 들이키며 총을 들었다. 그리고 막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시헌의 가오리를 날려버린다. 그에 깊게 멈췄던 숨을 뱉으며 입술을 축였다. 그 한 순간에 식은땀이 손을 적신다. 천역덕스러운 시헌의 목소리에 혀를 차고야 만다. 그가 겪은 시헌은 오로지 경쟁이나 충성 그런 것보다도 생존욕구에 모든 것을 투자하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당에 충성하는 것을 알기에 안심했었는데... -하는 얇은 신음을 흘린 재오가 흘끔 자신의 손에 있는 총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다시 떠오르는 류환의 말에 혼란스레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하고 찔러오는 대좌의 칼.

재오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지독하리 만치 올라오는 배신감 이전의 당혹. 그리고 보이는 좌표기의 모습에 아연하기까지 하다. 잠시의 고통과 갑작스런 출혈 때문인지 거뭇해지는 시야를 느꼈다. 찔린 곳이 찔린 곳이다 보니 널부러진 몸을 가누기가 좀 힘들었다.

 

그리고 다시 금방 눈을 떴다.

5446부대 백두조장이나 하는 자신이 겨우 칼빵 한 번 맞았다 쓸어진다면 지금까지 질투해온 인생이 아까웠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나지막히 이를 아려물며 의문, 알 수 없는 배신감, 아파오는 당혹을 내리누르며 들은 고개에... 보였다.

 

 

.”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잡은 총을 들어올려 조준했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 같은 손을 맞췄다.]

 

재오는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태원에게 칭찬받았던 사격. 그에게 인정받은 총. 자부심을 가지게 한 명중률. 저도 모르게 손을 조심스레 쥐어본다.

 

대좌가 처음이었다. 재오의 인생에 있어 처음이었다.

인정받는다는 것. 누군가에게 칭찬받는다는 것. 비교 없이 그대로 봐준다는 것.

 

그렇기에 재오는 그 지독한 열등감 덩어리에서 한 발을 뺄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 원했다.

 

이루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다.’

 

그 누구도 아닌 당신에게.

눈을 내린 재오의 시선 아래에 꽉 쥐어진 손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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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는 방법을 당신이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박 시헌

 

시헌은 대체로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그런 시헌의 눈에 김태원 총교관은 무섭고 이상한 아저씨, 상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가르치는 것을 배울 때마다, 그가 하는 것을 볼 때마다, 그가 말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살아남을 수 있다.’

 

확신 없던 그 생각에 확신이 새겨진다.

시헌은 뭐랄까... 포기가 빨랐었다. 많은 남매 중에 다행히 다정다감했던 그 가족들 사이에서도 음식에 대한 쟁탈에 눈치를 보며 챙기다 결국 포기를 배운 시헌은 어쩌면 5446부대 들어올 때도 나름 포기하면서 들어온 것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을 먹여 살리자가 아닌 한 사람 입을 덜어 주자라는 심정으로 입대한 것이리라. 심지어 그는 밥 한 번만 배불리 먹어보자, 라는 심정으로 훈련에 임했었다.

 

그렇기에 그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 챘다. , 내 가족들은 죽었겠구나. 순간의 복수심과 증오가 올라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포기도 빨랐다. 자신은 이미 들어왔고, 그들은 죽었으며, 그 누구에게 복수할 것인가. 누군지도 모를 높으신 양반들에게? 5446부대를 만든 얼굴조차 모르는 대장 동지에게? 이 상황을 야기한 가정을 버리고 도망친 아비에게?

그도 아니라면....

 

총교관에게?

 

그러나 그런 생각이 떠올랐던 것과 같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총교관에게 덤빌 일도 없었으며, 만약 그런 일이 있다해도 자신의 밥줄이 끝길 걸 생각한다면 시헌에게 포기는 당연했다.

 

시헌이 살던 마을은 유독 척박한 곳에 위치했었다. 동식물들에게 척박하고, 더더욱 사람들에게는 척박했던 그 곳은 언제나 음식이 부족했다. 그나마 자신의 어미는 나았다. 형제들이 먹을 것을 악착같이 찾았기에 굶주림에 눈이 돌아간 인민들처럼 자신의 자식을 바꿔 삶아먹는 짓은 할 필요도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언제나 시헌이 살던 그 시야가 닿는 곳에는 매주, 매달마다 꾸준히 아사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런 곳에서 살아왔다.

 

그렇기에 시헌은 유독 집착했는지도 몰랐다.

 

살아남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총교관인 김 태원은 좋은 롤모델이었다. 시헌은 그를 습관처럼 관찰하며 지내기 시작했다. 그의 작은 움직임이나 유독 눈에 띄는 움직임이라던가 그가 하는 말 하나하나를 귀담아 들었다. 그렇기에 시헌은 남이 보기 어려웠던 총교관의 다른 면모를 자주 보았던 것이 아닐까?

 

시헌이 그렇게 보게 된 총교관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겉으로, 그래 다른 5446부대는 눈치채지 못 할 정도로 잔정 같은 것이 많았다. 딱히 잔정이라고 하기에는 혹독하기 짝이 없는 훈련과 누구 하나 죽어나가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잔정-이라고 정의내릴 수 없었지만, 총교관은 그 누구에게도 소홀하지 않았다. 훈련생도 한 명부터 조장 한 명까지 착실히 눈여겨 바라보며 그들이 살아날 방도를 제시했다.

 

이상할 정도로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부어서.

 

시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자신이 밥 한끼, 몇 시간, 하루를 더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헌에게는 그게 가장 중요했으니까.

 

“.......”

 

시헌은 자신의 손을 보았다. ‘그 날가오리를 잘 못 다뤘는지 상처가 난 손바닥은 여전히 거즈와 붕대가 둘러져있다. 시헌은 눈을 깜빡이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불안한지 그의 옆에는 해진과 류환이 붙어있었다. ... 딱히 더 이상 뭘 할 건 아닌데..... 시헌은 그러면서도 다시 자신의 손을 보며 꼼지락거렸다.

 

그 날’.

그러니까 대좌 동지가 자신들의 살을 갈라 좌표기를 제거하고 건물 아래로 떨어진 그 날. 시헌은 얼어붙었다. 시헌의 롤모델은 태원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살아남을 것을 의심치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그의 등 뒤를 찔렀지만, 딱히 그것이 통할 거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의 손을 상처 입히며 날라가는 가오리에 당황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디서 날아 온지도 모를 총알이라는 것에서 오는 당황이었지 공격이 실패했다는 당황성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자신의 눈앞에서 추락하는 모습은 생각지도 못 한 충격이었다.

 

자살... 생각도 못 해본 결말이었다.

 

천천히 얼굴을 부빈 시헌이 문득 앞에 있는 이들에게 물었다.

 

왜 자살했을까?”

 

자신의 말에 살기를 내뿜는 해진과 눈가를 일그러트리는 류환을 보며 시헌은 순수하게 의문을 표했다.

 

?”

 

그라면 살아남고도 남았을 그 상황에 왜?

시헌은 안다. 5446부대에서 그 누구보다 태원을 지켜보았기에 장담할 수 있다. 태원이라면, 대좌라면 아무리 5:1의 상황이었어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렇기에 이해할 수 없다.

 

어째서, 목숨을 포기한 걸까?

 

답 없는 질문에 시헌은 다시 까슬까슬한 붕대감긴 손 안에 얼굴을 부빈다. 몇 번이고 자신이 보았던 그 광경이 재생되는 것 같다.

대좌가 떨어지고, 옆에 있는 이들이 비명을 지르고, 황 조장이 자신의 손에 들린 총을 떨어트리고, 서수혁이 무선기로 급박하게 상황을 전달하고 대기 중인 응급차를 부른다. 그네들에 손에 이끌려 내려온 곳에는 사라졌던 김은빈이가 얼굴을 감싸고 아니야.’라는 말만 끈임없이 중얼거리고 있었고... 그리고?

 

“......?”

그딴 게 뭐 중요하네?!?!!”

 

버럭!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해진의 외침이 귀에 닿지 않는다. 부비던 손을 멈추자 발갛게 이른 얼굴이 일었을 텐데도 느껴지지 않는다. 들것에 실리는 그 모습이 짜증날 정도로 망막에 남아있다. 이해할 수 없다. 살아남기 위해 살아온 시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

 

살아남으라고 했으면서 죽었지?”

 

자신한테, 앞에 있는 이들에게, 5446부대에게 그랬다.

죽지 말라고, 살아남으라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으라고.

 

그랬는데.... ?

 

시헌에게는 하고 싶은 것은 없었다.

단지, 살아남는 것만이 그의 이루고 싶은 것 전부였기에.

 

그러나 태원이 일어난다면 이번에는 그에게 배우고 싶은 것이 생겼다. 묻고 싶은 것도 생겼다. 이루고 싶은 것도 생겼다.

 

삶이라는 건 어떻게 살아가는 거야?’

 

살아남는 것 외에 이루고 싶은 것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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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포기한 것(부제: 저버렸던 꿈)

 

아비는 내가 기억을 할 때부터 없었다.

그리고 기억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할 때 조금 이상함을 느꼈었다. 그렇지 않은가? 어느 누가 어린애가 이미 성인이 돼서 죽었을 때까지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해 느낀 이상함보다도 기억이라는 것을 하자마자 인식해야 했던 현실이 더욱 급박했다.

그저 한 가지. 현실에 묻혔으나 뇌리에 남았던 것은 - 난 죽었었구나.’하는 그 이상하리만치 선명한 이질감.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제대로 생각하기도 전에 그 날의 먹을거리의 걱정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 때의 난 어렸기에.... 무지했기에 남도 다..

그런 줄 알았다.

 

그저 어렴풋이...

아주 어렴풋이 그 죽었을 때까지 있는 기억 안에서 나는 현재도 가지게 된 똑같은 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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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의 겨울은 추웠다.

혹독하리만치 추운 그 날에도 나는 언제 징병되어 죽었다는 형과 좀 높으신 양반이라는 남자의 첩으로 끌려간 누이를 대신해 야산을 몰래 뒤져야 했다. 그 마을에서 난 꽤나 박한 대접을 받고 있었기에, 어디가서 일할 건덕지가 별로 없었다. 하기야, 생각해보면 그랬다. 어리광이나 부리며 찔찔거려야할 어린놈이 무얼 안다고 야산으로 몰래 올라가 먹거리를 캐오는데 그게 정상으로 보였겠는가? 여타 어린놈답지 않던 나는 어른들마저 거피할 그네들 눈에는 분명 이상한 아이였던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그나마 황량한 그곳에 기생하는 식물이 간간히 있었고, 그 식물을 캐서 집에 몰래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나와 내 작은 동생들, 그리고 따뜻하시고 정 많으시던 오마니는 그렇게 생을 연명했다. 내가 캐온 먹거리와 오마니가 간간히 밖에서 일하고 받아오는 생활필수품과 음식.

 

그러던 어느 날이었던가? 아마도 숨을 조금 돌릴 수 있는, 그래 햇볕이 따사롭기 시작할 봄과 여름의 그 사이일 것이다. 그 때쯤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숨 쉴 구멍이 있었다. 먹을 것에 악착같이 음식을 구하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던 것 같다.

그 때 즘에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다른 따가운 시선을 통해 그 때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 ... 환생한 거구나.’

 

멈칫- 황량했던 그 언덕에서 제대로 된 인식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은 환생했다고. 하는 헛웃음이 났다. 전생-이라고 생각한 그 기억이 마치 물 아래에 침몰했던 부표처럼 순식간에 부상해 올라왔다.

 

나이 28이었던 자신. 어느 평범한 이들처럼 살던 자신. 부모는 없었지만, 신문에 나올 것 같은 고아원이 아닌 평범한 고아원에서 평범하니 고아라는 이유의 핍박 없이 꽤나 잘 자랐던 자신. 여자 친구와 기뻐하던 자신. 고아원의 아이들을 돌보던 자신. 원장님을 동경하던 자신.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오던 중 떨어지는 간판에 맞은 자신.

 

갖가지 기억이 올라왔지만, 결국은 마지막의 죽는 모습이었다. . 그게 다였기에 그 때의 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분명 그 전생의 자신은 지금의 자신과는 성격이 달랐기에 분명 완전히 부상한 기억을 가진 인격은 지금의 인격과 부딪칠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의 자신은 확실히 그 기억에 감사했다. 그 기억이 있었기에 그 어린 나이에 작금의 현실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어미는 북의 정부가 괴수라 칭하는 기독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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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심한 편이었다. 물론, 다른 종교에 대한 박해도 심했지만 다른 종교-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그들에게 김씨 일가가 신이어야 했으니까.

 

웃기지 않은가-

만약, 자신이 전생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어미를 따라 기독교에 투신했을지도 모르며 그도 아니면 저기 황량한 언덕 너머에 세워져있는 김정일의 동상을 맹신하며 조국통일을 부르짖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자신은 어미를 정부에 넘기지 않았을까? 조심스런 추측도 할 정도였다.

 

그랬기에... 어미를 위해,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위해.

군의 문턱에 발을 디뎠다.

 

생각보다 괴물이라고까지 소문난 자신은 문턱을 밟기 쉬웠던 것 같았다.

군은 힘들었다. 훈련도 힘들었다. 자신이 들어간 곳은 더욱 힘들었다. 무슨 특파 부대-였던 것 같았다. 그것도 점점 이상하게 자신만이 겉돌아 나중에는 자신만이 남에 내려가 개인 임무를 수행하는 등 생각해보면 기묘할 정도로 엘리트, 그 이상의 길을 걸었던 것 같다.

 

단지... 자신은 제 어미와 가족을 위해 힘을 냈을 뿐인데.

 

그래서였을까.

주위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기 때문일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을 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지하 교회에 대한 핍박은 생각보다 심했다. 내가 아무리 군에 들어가 공적을 쌓았다 해도. 생각보다 지하 교회에 많은 것을 하던 어미는 내가 군에 투신한지 몇 년도 채 되지 않아... 내 손으로 사살해야 했다. 작은 동생들마저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굳게 닫힌 눈과 마주친 어미의 눈은 그랬다. 쏘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덜너덜해진 그 헤진 옷과 피투성이가 되어 묶여있는 데도 잔잔한 눈으로 그리 말했다.

 

-하고 쏟았던 그 총신의 떨림을 기억한다. 무서울 정도로 손에 남는 그 잔재에 한 동안 총에는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일 것이다.

전생의 자아가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 환생..이라고 생각했던 근간이 흔들린 것은. 간간히 들렸던 리무혁 대장의 첩에 대한 애기가 들려왔다. 리해랑-이라 했던가. 거기서부터 아주 자그마한 의심이 싹텄을지도 모른다.

 

남은 동생들을 위해 지하 교회를 처벌했다. 혹여 모를 연좌제에서 감싸기 위해 지하 교회의 식구였던... 그래, 내 동생들을 보살피고 어미를 보살피고.. 한 때.... 그나마 친했던 이들을 쏴죽였다. 몇 명을 죽였더라? 몇 명을 손수 수용소에 집어넣었더라? 몇 명이었지? 아니, 그보다 누구를 어떻게 했었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그 나날들 속에 정신적으로 피로했다. 어미를 쏜 그 날부터 자신은 망가지고 있음을 확실히 느꼈다.

 

그런 자신을 구원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나라를 위해라는 명분이었다.

 

그 명분조차 전생 기억으로 흐리멍텅해져갔다.

 

그리고..... 탈북을 한 동생을 내 손으로 죽이고 나서야 온전히 남아있던 한줌의 그 때의 자신까지도 죽어버렸다.

 

아마... 아마도 전생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자신은 원작과 같이 더더욱 나라에 충성하며 고지식하고 완고하며 융통성 없는 군인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은 원작을 알고 있었으며 그 끝을 안다. 아무리 북에 충성해봤자 그 끝에는....

 

죽어버린 자아대신 부상하던 전생의 자아(기억)’는 어중간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으며 더더욱이나 가족에 대한 죽음을 지기에는 너무나도 잔정이 많았다. 그렇기에 부상한지 몇 일되지도 못 해 썩어 들어갔다. 남을 죽이기에도 연약한 그 전생의 김 태원이었던 자아는 망가진 현재의 김 태원의 자아와 엉켜들어갔다. 그걸 흔히 자기보호 본능이라고 하던가? 생존본능이라는 것은 가히 위대했다.

 

미래의 죽음을 알지만 현재의 자신을 지탱하기 위한 자신을 위한 충성을 나라에 받치며, 그 어느 날에 반드시 복수를 해주겠다 가족을 저버린엉키고 엉킨 삐그덕대는 자아가 완성되어 갔다.

 

전생의 원작과 지식, 그리고 사회생활을 하며 쌓은 연기를, 현생의 능력과 행동력, 결단력을 그렇게 억지로 끼워 맞춘 일종의 모순만이 가득한 김 태원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어느 한 순간에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두 생 모두의 연약함과 상처입은 짐승의 포악함, 난폭함을 그대로 지닌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전생에도 현생에도, 그리고 지금까지 그리 바라마지 않는 꿈은 변치 않았다.

 

회의적일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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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계속 부정했었다.

 

이것이 현실이 아닐꺼야.라는 미약한 부질없는 반항. 원작을 알고 있기에 설마-하는 심정. 겨우 종이 조각 안의 배역일거라고 생각하기 싫은 나약함.

 

그리고 부딪친 현실에 쓴 물을 삼켜야 했다.

 

“.........”

 

눈가가 욱씬거렸다. 안돼!하고 왜치는 남성은 단말마같이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애원하듯이 외쳤다.

 

수혁아!’

 

-하는 깨달음과 함께 잠시 멈칫거림으로 오른 눈가에 상흔을 얻었다. 조금이라도 깊었다면 시력을 잃었을 만큼 위험했던 상처... 그 상처를 얻으면서야 겨우 체념에 가까운 감정을 가졌다. 어느 날인가 지 진우라는 이를 탈출시키는 것을 돕고 자신이 전생에 가진 지식을 총동원해 준비하던 계획조차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 했으리라.

 

어쩌면 눈가가 아닌 턱에 났어야 할지 모를 상흔을 쓰다듬으며 쓴 숨을 뱉었다. 그 날 처음으로 자신은 리 해랑과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었다. 들려오는 소문을 떠올리며 여린 아이를 끌어안아 올렸다.

 

자신을 시험작으로 부대 하나를 개설한다고... 물론, 그런 이유만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아마도 이 말도 안 되는 자신의 부모까지 죽인 괴물이 꽤나 매력적이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안고 있는 작은 몸에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아아- 이 얼마나...

 

나약한 생물이란 말인가, 자신은.

혀를 내두르며 아무것도 없는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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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모조차 죽인 완전무결한 괴물을 만들 부대

2. 자신의 손으로 죽인 서수혁의 아비

 

“......”

 

찍찍 문장 두 개를 써놓고 한 동안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그 아래에 써넣는다. 그러면서 지어지는 허탈한 웃음을 어찌할까. ‘김 태원이라는 이름이 그 김 태원이었나? -하는 쓰디쓴 숨을 들이켰다. 내쉬고 마시는 숨마저도 아프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은 그 날 처음으로 지하 교회 사람들을 처넣은 수용소로 발길을 향했다.

 

가장 악독하다는 그 정치범 수용소.

그곳에서 자신은 죽어버린 자신들의 과오를 보았다.

 

“...살고 싶네?”

 

그렇게 물었다.

아이는 무척이나 비쩍 말랐으며 눈은 이미 살아있는 이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한 구석 악착같은.. 그리고 자신과도 닮은 그 나이에 맞지 않는 그 눈.

 

아이는.. 그래, 아니는 그랬다.

그 끌려갔다던 누이의 아이였다. 하하-하는 허탈한 웃음을 삼켰다. 알게 된 사실은 간단. 연좌제로 첩으로 들어갔던 누이를 데려갔다던 높으신 이가 손수 수용소에 처박으셨단다. 기억에도 흐릿한 누이가 어떤 심정으로 이곳에서 아이를 나았는지는 모른다. 그저 그 앙상한 손바닥에서 자신은 마지막 남은 혈육을 죽였을 때를 떠올랐다.

 

끈적하니 피비린내 가시지 않던 몸과 따가운 햇빛, 이제는 발아래에서 싸늘히 식어가는 시체에 그 때에야 왈칵 겁이 났다.

덜덜 떨리는 몸을 느끼며 떠올렸다.

 

자신은 혼자가 되버렸다.

 

-하고 잡히는 손에 그제야 현실로 부상한 정신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아이를 데려와 보살폈다. 혹 모르는 일이기에 최대한 자신의 눈 아래 두기 위해, 정부의 눈을 피하기 위해 5446부대에 입대시켰다.

 

때가 되면....

 

“......아아.”

 

-그렇구나.

희미하게 웃었던 것 같았다.

 

무심코 깨달아 버렸다.

5446부대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거친 손 안에 얼굴을 묻었다.

 

그 날 자신은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세웠다.

 

그 안에.

자신은 없었다.

 

저버려야 했던, 포기해야만 했던, 눈 돌려야 했던 꿈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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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따르는 이의 이야기(부제: 곰이 보기에는...)

 

최완우는 눈을 껌뻑였다.

 

“.......”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영 심상치 않은 분위기. 느즈막히 턱을 그 두터운 손 끝으로 긁었다. 으음.. 그니까.... 순박한 눈을 이리저리 굴려도 보았다.

정신없는 자신의 조장과 같이 으르렁대는 황 조장, 박 조장(시헌)을 감시하는 원 조장과 해진 조장, 그리고 뒤처리 때문에 바쁘기 그지없는(정부와 협상 중이라는) 서수혁 조장을 대신해 의사와 면담을 했다.

 

그러니까....”

여기저기 긁혀서 찢어진 것, 살짝 뇌진탕이 온 것 외에는 꽤나 양호한 상태입니다. 물론, 입원했을 당시에는 꽤 심각한 상태이기는 했지요. 뼈도 꽤 많이 금이 가 있었고, 무엇보다 스트레스성 위염이 꽤 심하시더군요. 전 살다 살다 그런 부상으로 오셔서 스트레스성 위염으로 구멍 뚫린 게 더 심하신 분은 처음 보았습니다.”

 

하하- 웃는 의사에 완우는 느릿하게 문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저 밖에 있는 조장 동.. 으음.... 완우는 잠깐 눈을 꿈뻑이다 이내 느릿하게 말을 골랐다.

 

...... 왜 안 일어나시는지....”

... 아마 피로도가 꽤 쌓이셔서 그런 걸 겁니다. 게다가 약하기는 하지만 뇌진탕도 염두해 두어야 겠고, 내장에서 출혈도 꽤 있었으니까요. 그래봤자 끽해서 길어봐야 한 달이면 정신차리실 겁니다. 물론, 지금의 회복세를 본다면 일이주일이면 일어나시겠죠.”

 

완우는 다시 눈을 꿈뻑였다.

그러니까... 그 말은.... 대좌님이 지금 못 일어나는 건.... 다시 느릿하게 문으로 시선을 준 완우가 다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이번에는 여전히 문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러면... 그 스트레스성 위염이라는건.....”

... 아마 나이도 꽤 있으신 것 같고.... 요즘 무언가 고민이 많으셨던 것 같습니다. 위가 뚫릴 정도면 꽤 고통스러우셨을 텐데 말입니다.”

 

의사가 난색을 표하며 말해온다. 완우는 의사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의사가 선선히 손을 흔들며 등 뒤에 대고 말한다.

 

, 신경쓰지 않으시게 조심 좀 해주세요.”

“....”

 

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을 보며 완우는 천천히 낯을 어둡게 만들었다.

하나같이 어두운 낯으로 모여있는 이들은... 안타깝게도 자신의 경애해 마지않는 조장이 가장 걱정되는 요인이었고, 그 옆에 불퉁한 얼굴의 황 조장에 음산한 살기를 뿜는 해진 조장은 더더욱이나 곤란했으며, 어쩐지 축 늘어진 박 조장은 꽤나 곤란한 부류였다. 게다가 여기 보이지 않는 김 부조장은 또 어떠한가?

 

...., 그나마 나은 것 같은 원 조장을 끝으로 완우는 저기 복도 끝에서 터벅터벅 걸어오는 서수혁을 보며 천천히 입을 때었다.

 

 

스트레성... 위염이 심하시답....네다. 신경...쓰지 않게 잘 하시라... 의사 선상님이... 그러십네다.”

 

뭐요?!?? 시헌이 입을 쩍- 벌리며 고개를 파딱 든다. 그리고 그 뒤로 처음 보는 하회탈의 남자가 달려오다 말고 미끄러져 벽을 잡고 낄낄거리며 웃기 시작한다.

..... 이게 남조선 말로 그 막장이라는 건가.

 

완우는 한숨을 푹- 내쉬며 웅성거리는 그네들을 보며 어떻게 하면 될까 가장 연장자(진우 제외)로서 생각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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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6부대에서부터 완우는 그랬다. 느즈막히 나이를 먹어 들어와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쩐지 그 챙겨주는 모습이나 받아주는 모습에서 완우는 여기 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 얼핏 아비의 모습을 보았다. 물론, 아쉽게도 완우는 꽤 나이를 먹었고 어느 누구들과는 달리 꽤나 안정된 정신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시헌처럼 어느 한 곳 결여되지도 않았다. 재오처럼 자신을 비교하거나 하지 않는다. 류환처럼 가족에 목메어 주위를 둘러보지 못 할 정도로 외골수가 되지도 못 한다. 해진이나 은빈처럼 한 곳만 바라보며 달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완우는 그 누구보다도 완숙된 자아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것은 해랑의 덕분일 수도 있다.

완우는 해랑에게 감사한다. 그가 아니었으면 그네들은 어느 조와 같이 살벌하게 서로를 경계해야 했을 것이다. 해랑의 그 넉살에 그 특유의 든든함에 기댈 수 있었다. 물론, 도련님인지라 완우가 뒤에서 이것저것 해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요인이라면 요인이리라.

 

그런 완우에게 총교관이었던 대좌는 불안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알기 힘들었다. 어느 흑룡조 조원처럼 훈련병들처럼 그저 무서워했었고, 감격에 차 바라보았었다.

 

완우가 총교관을, 태원을 불안한 사람이구나-하고 깨달은 것은 이상하게도 남에서 올라온 그를 보았을 때다.

이상할 정도로 표정 없는 그는 아둔한 자신이 보았을 때도 평소 같지 않았다. 그러다 완우는 대좌와 함께 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나서야 조금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나서야 깨달았다.

 

, 이 사람은 언제나 한 발작 물러나서 보고 있었구나. 마치,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다-라고 먼저 서상구 교수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러 가 해랑 조장과 재회하며 그 나날들을 들으며 알았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가 건물 밖으로 떨어질 때도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며 아래로 내려갈 수 있었으리라.

 

내려온 그곳에 김 은빈 부조장이 망연히 있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대좌를 수습해 들것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일 것이다.

 

“....어서 눈..... 뜨시라...., 대좌 동......”

 

한숨같이 터져 나온 말이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잔재해있었다. 의사의 말과는 달리 한 달이 넘게 깨지 않는 그 모습이 심히 걱정이 되었다. 의사의 말로는 몸에는 아무 문제 없다하는데 무어이 그리 피곤하신지 아직도 누워만 계신다.

 

똑똑- 떨어지는 링거를 보며 보조 침대에 누워있는 은빈을 추스르고 태원의 이불을 좀 더 올려주며 병실을 훑었다. 딱 달라붙어있는 은빈 말고도 교대로 조장들이 자리를 지켰다. 스트레스성 위염이란 말이 없었다면 이 병실은 꽤나 부적거렸으리란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완우는 쓴 웃음을 지으며 부디 하루 빨리 태원이 완쾌하기를 빌었다.

 

 

생각보다 조장들의 땡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거칠어서 아무리 큰 완우라도 병실 문 막기에는 버거웠다.

지금처럼.

 

“....비키라우, 최 조장.”

“..... 됩니다.”

 

오늘도 완우는 대좌의 심신 안정을 위해 문을 사수합니다.

땡깡부리는 해랑 조장이 참으로 곤란합니다.

 

그리고 한 달이 된 어느 새벽.

 

"..."

 

태원의 눈이 조심히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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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죽음을 넘도록 한 꿈

 

어렸을 적.

아주 어렸을 적부터.

그래, 아주 먼 그 어렸을 적부터.

 

이루고 싶었던 꿈이 있었다.

 

Written by. 어쩌다가-

 

전생의 김 태원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는 고아였다.

어미도 아비도 없는 고아였다.

 

누구나 격을 고아라는 핍박도 받아보았고, 열등감에 시달려보기도 했고, 좌절해보기도 했다. 그렇게 살아온 전생의 김 태원에게는 꿈이 있었다.

 

“.......”

 

대학생이 된 그는 길을 걷다 무심코 보이는 한 가족의 모습을 가끔씩 빤-하고 바라보고는 한다. 마치, 부러운 듯도 하고 가지고 싶은 듯도 하고..... 그래. 동경하는 그런 눈으로 빤-하고 바라보고는 한다.

 

전생의 김 태원이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도 했다. 그런 그에게 같은 고아원 출신인 한 여인이 애인으로 있었다. 둘은 꽤나 알콩달콩한 편이었다. 가족 없는 서러움을 알기에 더더욱 서로를 보듬기도 했다. , 둘의 꿈은 서로 맞물리는 면이 있었기에

 

있지, 태원아. 우리 결혼하면.. 애를 몇 나으면 좋을까?”

 

방글거리며 웃는 그녀는 손에 들린 빨래를 가지런히 개며 즐거운 얼굴로 물었다.

그 때 태원은 어떻게 대답했더라?

 

.... 많이.. 많이 나아도 되지만...”

 

꽤 평범한 대답으로 시작했었다. 군대에 가서 배우게 된 담배를 꼬나물고 차마 불을 붙이지 못 하면서 그렇게 베란다에서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 입양도 하고 싶어.”

 

그렇게 담담히 말하는 태원에 그녀는 잠시.. 아주 잠시 빨래를 개던 손을 멈췄다 살풋이 웃었다. 넌 참 상냥하구나.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참으로 잔잔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꿈꿔온 꿈이 한 발작.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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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원이 든 눈에 비명성과 함께 울리듯이 떨어지는 간판이 보였다. 아마도 공사부실이 이유일 것이다. 빠르게 가까워지는 그 간판을 보며 옆에 있는 사람들을 밀었다. 별 이유는 아니었다. 희생정신도 아니었고, 자신을 위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무의식적으로 살기 위한 몸부림과 같았다.

 

그러나 예감했다.

... 나 죽는구나.하고서

 

-하고 자신을 내리누르며 찍어오는 간판에 벌건 피가 눈앞에 흐드러진다. 아마도 제 피일 그 뜨뜻한 것은 3명의 남성이 포스팅되어 프린트된 간판에 튀어 번져간다.

그녀가 좋아해 2번째로 재탕하게 된 영화의 간판은 꽤나 아팠다.

 

감은 눈이 편치 않는 것은...

 

아마도 이루지 못 한 꿈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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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자각이라는 것을 하기도 전에.

 

태원은 또 꿈을 꾸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전생의 김 태원의 꿈과 똑같았다.

 

가끔.. 가끔가다 생각하고는 한다.

이 꿈 때문에 자신이 김 태원이 된 걸까, 그도 아니면 이름이 같아서 김 태원이 된 걸까, 그도 아니면.....

 

물론, 무척이나 생산성 없고 시답잖은 고민이었다.

 

태원은 착각하지는 않았다.

착각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과 전생의 김 태원은 분명 달랐기에 자신의 꿈에 대한 의문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꿈을 전생 때문이라 생각할 필요 없었다.

 

어무이, 좀 드시라요.”

 

물에 갠 묽은 죽을 한 수저 떠 초췌해진 어미에게 먹이고, 남은 동생들을 도닥여 재운 뒤 어느 때처럼 맑기 그지없는 거대한 하늘을 바라본다. 조용히 고고(구구의 북한말)하고 우는 새소리가 배곯는 현실에도 따스한 가족 같았다.

 

전생의 김 태원은 이루지 못 한 그 꿈.

자신은 이루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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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웁- 우웨에에엑

 

태원은 속에 있는 것들을 몽땅 게워냈다. 들키면 안돼.하는 소리가 안에서 울렸다. 이 소리는 언제부터 울리기 시작했을까? 태원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가를 훔쳤다. 게워낸 음식들이 아깝다. 침체한 눈가를 주무르며 몸을 추스렀다.

 

동생들.. 어린 동생들은 자신을 원망한다.

왜 어미를 죽였냐- ! 그런 눈으로 바라봐 온다. 그러나 그 원망을 자신에게 쏟지 않는다. 단지, 슬픈 듯도 하고 증오스럽기도 하고 죽은 듯도 한 절절한 눈으로 바라봐온다. 태원은 자신의 눈 위에 손을 덮었다. 컴컴한 손 안은 어쩐지 조금 아늑한 것 같았다.

 

“...하아......”

 

내셔오는 한숨이 아프다. 슬쩍 벌린 손가락 사이의 하늘은 여전히 고고했다.

 

그리고 태원 며칠 후 탈북을 한 동생을 총살했다.

도망치던 동생을 추격해 목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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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얼굴이었지, 내 동생들은?

어떤 얼굴이었지, 내 어미는?

 

“.......우으...”

 

벽을 박박 긁었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점점 흐릿해지는 기억 속의 어미와 동생들의 얼굴. 단지, 떠오르는 것은 어렴풋한 죽는 그 순간 잔잔하기 짝이 없는 그 눈. 그 어렴풋한 흐린 느낌의 표정. 원망도 증오도 없던.....

 

우웁-”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몸을 둥글게 말아 떨었다. 나는.. ... 왜 죽였지? 이제야 마지막으로 죽인 동생을 인식하고 떨리던 몸의 연장선마냥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무심코 어느 한 감각을 떠올린다.

 

죽어가던 그 감각.

 

... 흐윽-”

 

단지...

몸이 아닌 정신이 죽어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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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원은 멍하니 자신의 품 안을 보았다.

낮은 숨을 쉬며 기절하듯 잠든 아이가 있다.

 

서 수혁

 

어쩌면 증오스러울지도 모른다.

조용히 아이를 다른 방에 데려가 눕히고 이불을 끝가지 덮어준다. 조심히 나와 문을 닫고 내던졌던 나이프를 챙겨들고는 미련없이 자리를 떴다.

 

서 수혁

 

조심히 머리 위에 야구 모자를 뒤집어쓰고 천천히 쓰고 쓴 목소리로 입을 연다.

 

서 수혁

 

숨이 턱-하고 막혔다.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몸을 웅크리고 꺽꺽거렸던 것도 같다.

 

한 번.

그날 딱 한 번.

 

숨이 멎었다.

그리고.

 

죽었다.

 

“........”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속에서 들리던 소리에 한 명이 더 엉켜들어갔다.

 

태원은 그 날 어느 날인가.. 그래, 어미와 어린 동생들을 전부 죽이고 나서.... 탈출시켜 주었던 지 진우를 찾았다. 얼어붙은 그 녀석을 보며 죽어버린..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 한 자신에 대해 애도하며 말했다.

 

“.....네가... ... 날 도와라.”

 

거칠한 목소리에 무척이나 지친 체념이 깊게 묻혀있다. 진우의 끄덕임을 보며 태원은 정신을 잃었다.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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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원은 유리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하얗게 되어버린 세상에 자신은 꽤나 이질적이었다.

 

자신은 누굴까?

전생의 김 태원일까, ‘북의 김 태원일까?

 

아니면, 그 찌거기일까?

 

차가운 유리창 밖으로 어느 김 태원의 고향인지 알 수 없는 북이 보인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감겨진 눈이 아리다. 더 이상의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듯이 두 명의 김 태원이 공존하던 자신은 괴멸했다. 그렇다면 여기 남은 것은 대체 뭘까.

 

“...꼬마동무.. 여서... 뭐하네....”

 

멀뚱히 굳어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꼬마를 보았다.

어리고도 한참은 어린 꼬마가 황망히 자신이 내미는 천조각을 보며 굳어있다. 이 추운 겨울날에 걸친 옷이라고는 하나. 천천히 그 걸어온 길을 보았다.

 

...꼭 자신 같구나.

 

그 붉은 작달만한 발자국을 찍어온 눈길이 절망적이리만치 자신과 닮은 것 같았다.

천천히 들어 올린 아이의 체온은 차가웠다.

 

“...잠깐... 내래 집에서 쉬고 가게, 꼬마동무.”

 

한숨처럼 북의 말도 남의 말도 딱히 칭하기 어려워진 억양의 말을 내뱉으며 담배를 뱉었다.

 

자신을 마루타로 쓴 부대의 창성 애기를 어렴풋이 흘리며 나약한 자신을 비웃었다.

안아 올린 아이의 체온이 차다.

 

...리 해랑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체념한다.

 

자신은 아직까지도 꿈을 버리지 못 했구나.

나약하구나.

 

품에 안은 아이의 옷자락에 뜨거운 물방울이 두어 방울 떨어졌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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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해랑이 자신에게 다시 꿈을 재확인 시켜주었다면, 김 은빈은 자신에게 구원이었다.

 

“......”

 

조심히 은빈의 이불을 덮어주며 그 얼굴을 본다.

제 손으로 다 죽여버린 가족들이 떠오른다. 그래서 차마 손도 대기 무섭고, 댈 수 도 없다. 그러나 그보다도 끔직한 것은....

 

자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그 안도감이 구역질났다.

늪 같은 고독감에서 해방이라도 된 듯한 느낌에 자괴감마저 들었다.

 

은빈을 처음 발견했을 때 태원은 구원받은 느낌이었다.

가족이 아직 남아있다. 속죄할 수 있다. 혼자가 아니다. 그 여러 가지 감각이 엉켜들어갔었다. 그렇기에 태원은 더욱... 은빈에게 손을 뻗을 수 없었다.

 

가냘픈 아이를 도닥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천히 무기를 이리저리 몸에 쟁여 넣으며 쓰게 웃었다.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는 삶이구나. 어렸을 적에는 배고픔에 가시지 않았고, 커서는 살기위해 가시지 않았고,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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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좌 직위와 함께 5446부대의 총교관이 되었을 때 태원은 오열했다.

소리 없이 오열했다.

거친 손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아아....”

 

예상한 바였다.

태원이 해랑을 돌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마도 자신은 리무혁의 개로 보였을 것이다. 조심히 얼굴을 부볐다.

 

자신은 북의 개였다.

그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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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숨이 턱턱 막혔다.

 

자신 앞에 있는 서수혁.

서수혁.

 

아마도 자신의 표정은 일그러지지 않았을까.

간신히 잊어버렸던 죄책감이 부상했다.

무뎌졌다고 생각한 안의 목소리가 시끄러워졌다.

 

오른 눈가가 아프다.

 

태원에게 있어 서수혁은 죄책감이었다.

 

넌 살인자야.’

 

그리 말해주는 죄책감이었다.

죽어버린 정신은 금방 아래로 꺼져버렸다.

 

그러나 서수혁을 마주치는 그 순간만큼은 계속해서 느끼고는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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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놈.”

 

일주일 중 쉬는 몇 시간마저 훈련에 때려박는 원류환을 지켜보며 중얼거렸다.

미련하다. 귀도 눈도 생각도 다 막아놓고 매진하는 원류환은 미련하다. 조금만 열어도 알 수 있는데 외면하는 그 모습이 미련했다.

 

“.......”

 

꼬나문 담배가 쓰다.

그러나 놓지 않는 그 모습에 울 것 같다. 만약... 자신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눈에, 표정에 한숨을 쉰다. 비가 왔으면 좋겠어. 입에 문 담배를 비벼끄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원류환에게서 동질감을 느낀다.

그렇기에 안타까움과 동시에 부러움을 느낀다.

 

나도... 저랬다면..... 좀 달라졌을까?

 

“....미련해.”

 

누구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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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언제나처럼 잘도 흘렀다.

 

트러블 없이 밍밍하니 다른 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박시헌에게서 아득바득 살려 노력하던 자신을 보았다.

열등감과 질투에 사로잡혀 살며 사사건건 리해랑과 부딪치는 황재오에게서 고아였던 자신을 보았다.

어린 나이에 들어와 자신의 윗배를 동경하는 리해진에게서 자신의 어린 동생들을 보았다.

나이가 많지만 어리숙하고 누굴 속일지 모르는 고지식한 최완우에게서 전생이 없었다면 똑같았을 자신을 보았다.

이해하기도 힘들고 깐죽거리며 이리저리 자신을 찔러보면서도 정이 들어찬 눈으로 보는 지진우에게서 형제애를 보았다.

 

5446부대를 가르치며 키워내며.....

 

“......”

 

저기서 훈련하는 부대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태원은 얼굴을 거친 손에 묻었다.

아아-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신은 태평히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딱히 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가족을 죽이게 하고 자신마저 괴멸시킨 위에 복수 아닌 복수를 해줘야겠다 생각한 것은 자신을 위해서였다. 속죄의 한 방편이었다. 그저 이제는 어미도 동생들도 죽은 것에 울지 못 해 비오는 날 돌아다니는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렇기에 딱히 그 후는 정하지 않았다.

죽는다면 죽는거고, 산다면 사는 거겠지.

 

그렇지만, 살 방법정도는 짜 넣어놨었다.

 

그러나...

어찌살까?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묻은 손 안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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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쏘인 자신의 손이 아프다.

날라가는 총을 보며 허허로이 웃고야 만다.

 

요 몇 달 동안 신경을 써서 그런지 위가 아프다. 너무 아파서... 총 맞은 손 따위 별로 아픈 것 같지도 않다.

 

“.....”

 

떨어지는 내내 생각하고 만다.

리해랑의 얼빠진 얼굴, 리해진의 홍조어린 얼굴, 원류환의 맹한 얼굴, 서수혁의 곤란한 듯한 얼굴, 최완우의 당황스러운 얼굴, 황재오의 짜증어린 얼굴, 박시헌의 해탈한 얼굴, 김은빈의 뚱한 얼굴, 지진우의 개구진 얼굴....

 

그리고....

 

"..."

 

떠진 눈이 아프다.

보이는 것은 하얀 천장. 밖으로는 푸르른 새벽하늘이 보인다. 몸을 추슬러 일어나려니 삐걱여 도무지 일어서기가 여의치 않아 그저 조심히 상체만을 베개 위에 기댔다.

 

“........”

 

아무도.. 없는 걸까?

자신의 계획은 성공한 걸까?

 

그런 걸까?

 

꿈이 있었다.

전생에는 고아였기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꿈이었고, 현생에는 급박한 현실이었기에 가질 수밖에 없었던 꿈이었고, 지금은 그 꿈을 이어받기라도 하듯 꿈꾸게 된 꿈이었다.

 

5446부대를 가르쳤다.

그 먹을 거, 입을 거, 거주할 곳 모두 손수 고르며 키웠다.

 

그들이 자신을 두려움과 선망의 눈으로 보는 것을 안다. 그러나 자신의 손으로 키웠다.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보았을 때, 돌렸을 때 그곳에 있었다.

 

그렇기에...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

 

“........”

 

눈물일까.

뚝뚝 떨어지는 이건 눈물일까?

 

태원은 그래서 그들에게 가르쳤다. 죽지 말라고 가르쳤다. 살아남으라고 가르쳤다.

가르치고 가르치고 알려주고 말해주었다.

 

[죽디마라]

 

그게 그의 진심이었다.

아마도 죽었다 꺼진 붉은 점 몇 개는 지들이 살을 째 없앤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다.

 

!

“......”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리고 열린 병실로 시커먼 녀석들이 우루루 들어온다. 태원은 저도 모르게 눈을 땡그라니 떴다. 맨 뒤에 헉헉거리며 들어오는 서수혁의 손에 들린 헤드폰이 꽤나 시끄럽다.

 

..대좌...”

 

말을 잊지를 못 하는 완우가 손을 들었다 놨다 한다. 은빈은 벌써 다가와 이불자락을 쥐고 끅끅거린다. 해진은 손에 얼굴을 묻고 입술을 앙 문다. 류환은 어떻게 하지도 못 하고 자리에 멀거니 서있다. 해랑은 어느 새 다가와 태원을 와락 끌어 앉는다. 시헌은 자신을 손을 쥐락펴란 하며 자신의 눈치를 살핀다. 재오는 해랑을 뻥뻥차며 울고 있다. 진우가 저기쯤에서 허탈히 웃으며 자신을 바라본다.

 

“...으윽... ... ..죽는디 알았.....”

뭐라하는 기네!!”

 

짜증어린 재오의 말과 해랑의 울먹임이 울린다.

 

“.......”

 

얼결에 해랑과 은빈을 토닥이던 태원은 그네들을 돌아보았다.

넓었던 병실이 꽉 찬 것 같았다.

 

꿈이...

꿈이 있었다.

 

 

 

 

아버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있어 좋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전생에는 고아였기에... 가지고 싶었다. 가족도 가지고 싶었지만... 자신처럼 없는 녀석에게도 기댈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든든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현생에는 가장이었기에... 가지고 싶었다. 어미에게 의지가 될 만한 남자, 동생들을 굶지 않게 할 성인, 자식들에게 인자히 웃어주는 따스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부럽디 부러웠던...

그것이 되고 싶었다.

 

눈을 감았다 뜨자 눈가로 흘렀던 물방울이 떨어진다.

이건... 언제의 눈물일까.

 

 

다녀...”

 

한달을 채우도록 잠긴 목소리가 까끌하다.

 

“...다녀왔어.”

 

떨어지는 그 순간 내내 생각했었다.

 

5446부대에 있던 그네들의 얼굴. 자신을 보며 교관 동지-하며 부르던 그 얼굴. 무서워하면서도 어느 날인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져있는 열매 몇 개. 쭈삣거리며 다가와 칭찬을 바라는 모습. 자신의 분위기가 안 좋아지면 덩달아 울상인 녀석들.

 

 

 

다녀왔어.”

 

조금 힘없는 목소리에 원류환이 어설피 웃으며 말한다.

 

어서 오시라요.”

 

 

 

 

아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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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아버지와 아들들(부제: 가족이 되기까지)

 

태원이 눈을 뜨고, 우르르- 달려온 이들의 전말은 사실 이러했다.

 

“........”

“...?!?? 팀장님?!?”

아니, 어디 가세요!!”

“-시끄러워! 나 급해!!”

 

국정원 서수혁 팀 일동 뭐가?!??’하는 얼굴로 보았으나 수혁이 굉장히 급해 보여 잡을 수가 없었다. 수혁은 빠르게 복도를 지나쳐 걸으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핸드폰을 확인했다.

핸드폰에는 한 화면이 둥둥 떠 있었다. 바로 태원의 병실이었다.

 

‘-깨어났어!!’

 

국정원의 권력을 이용한 스토커질은 참으로 탁월했다.

그런 수혁에게 날라온 것은 CCTV요금과 과속 벌금 청구서.

 

그리고 날듯이 온 수혁의 모습에 눈치 빠른 간첩들이 우르르 따라들어와...

 

으허어어어엉!”

흐윽....”

 

현재 이런 상황까지 와 있다.

 

“.......”

 

훈훈했던 방금 전의 태원과 류환의 대화에도 불구하고 마치, 돌아간 것 마냥 넋놓고 울고 있는 그네들에 점점 태원의 기가 빨림을 느꼈다. 아니, ... 그만 하라고.... 뭐야, 뭔데?! 무섭게 왜 이래?!?!! 오랜만에 부활한 작은 태원이 오들거렸다. 태원의 나빠지는 안색에 조용히 진우가 벽을 잡고 부들거린다. 끄앙! 분명, 당황하고 있어. 당황하고 있다곸!!! 벽을 탁탁 때리며 부들거리는 꼬라지에 옆에 있던 완우의 눈매가 더러워졌다. ..뭐네?!?? 흡사 미친 무언가를 보는 눈이었다.

 

“...... 그만 울라.”

흐어허엉- ..얼마나.. 얼마나 놀랐는... 흐어엉-”

끕끄읍... ..듁는 줄.. 알그.....!”

“......대좌 동,..”

 

이제는 해진이마저 끕끕거린다. 태원이 혼미한 눈으로 류환과 수혁을 올려봤다. 류환은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고, 수혁은... 어느 새 사라졌다. 아 애는 무슨 홍길동이야? 허구헌날 동에 번쩍 서에 번쩍거려?!?? 작은 태원이 애꿎은 수혁을 탓 한다.

태원은 다시 엉엉- 울고 있는 머스마 3명의 동그란 검은(중간에 노란 머리는 스파이인가?) 머리를 보며 한숨을 내쉬며 가장 익숙하고도 확실한 말을 골랐다.

 

 

... 닦치라.”

“...흡끅-”

...”

“....”

 

눈이 빨게 져서 올려다보는 녀석들 나이가 옆에서부터 18, 24, 27이란다. 죽갔디, 아주. 작은 태원이 초탈한 얼굴로 벽을 부여잡는다.

왠지 깨어난 게 영 잘 못한 것 같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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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이 깨어나고 부터는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우선, 태원이 누워있던 한 달 동안 간첩들은 알아서 돌아가며 국정원과의 면담 시간을 거쳐 탈북민에서 남한 국정원으로 둔갑해갔고, 언제 빠져나갔는지 진우와 그 일당은 법적으로 구속할 명분이 쥐똥만큼도 없어졌다.

 

가장 위험할 거라 생각했던 태원은 아예 전담이었던 수혁이 손수 나서서 협상 아닌 협상으로 자신의 감시 하에 지켜보는 것으로 협상을 끝낼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시시하게 지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워낙에 태원이 한 일 자체가 은밀했으며, 흔적이 없었고, 그 있었던 흔적조차 진우와 수혁의 손에 싸그리 태워졌다.

 

그리고 태원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그러니까.”

 

태원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바들거렸다.

태원은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를 보며 앞에 있는 머스마들을 훑고 다시 서류에서 수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서류는 가족증명서류였다.

 

내가... 아버지고.....”

“......”

 

수혁이 조심히 눈을 피한다.

자신이 생각해봐도 이건 꽤 심한 것 같기는 했다.

 

무려.... 5명이나... 애가 있다?”

 

참고로 +α2(황재오, 서수혁)이 더 예비로 있다고 수혁은 차마 본인의 입으로 말할 수 없었다. 태원은 끼긱-거리는 목으로 반짝이는 눈으로 보는(1명 제외) 머스마들을 올려보았다.

 

“.......”

 

작은 태원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려왔다. 아버지가 되고 싶었지만... 쟤네는 좀... 좀 그래. . 너네는 좀...... 태원의 얼굴이 여과 없이 아득해져 그네들을 올려다보았다. 시헌만이 휘파람을 불며 눈치를 볼 뿐 전부 부끄러운 얼굴이라던가 쑥스러운 얼굴이라던가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작은 태원을 더더욱 좌절시켰다고 한다. 으아니차!! 이건 아니제, 작가 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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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이 퇴원 수속을 받는 동안 7명하고 +1명은 머리를 모아 대화를 했다.

 

기래, 이제 우얄끼네?”

어떻하기는요, ....아버지... 모시고 살아야죠.”

 

유난히 시헌에게 틱틱거리는 막내였다. 시헌은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해진의 눈치를 본다. 난 자가 쪼매 무수븐데.... 막내의 패기가 좀 많이 무서운 첫째(충격적이게도 완우 다음으로 나이가 가장 많았다.)되시겠다.

 

기게 아이고, 집이랑 밥이랑 뭐 그런 거.. 우찌할 낀데?”

.....”

 

생각지도 못 했다는 듯이 해진과 해랑, 그리고 은빈의 입에서 단말마가 튀어나왔다. 그 모습에 완우는 익숙하다는 듯 이마를 집는 류환의 어깨를 토닥인다. 익숙해지면 편해요. 수혁이 그 모습을 쓱- 보다 이내 툭 말을 꺼낸다.

 

내 집에서 생활할 거다만?”

“...뭐시라?!??”

 

해랑이 과한 액션을 취하며 놀란다. 그 모습을 수혁이 꽤나 한심하단 얼굴로 바라보며 이 자리에 없는 재오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이미 황재오가 준비하고 있다만?”

 

뭐냐, 그 어이없는 행동력은?! 진우가 경악스런 얼굴로 수혁을 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 ! 나랑 같이 살자고 하려 그랬는데!!!”

 

그게 더 무서운데?!?? 전에 류환의 뺨을 날리던 그 모습을 기억하던 간첩3인방과 국정원이 충격어린 눈으로 진우를 보았다. 재는 안돼. ㅇㅇ 잰 빼고. 4명의 의견이 합일하는 순간이었다.

 

일단, 아들로 해놨기 때문에 성이나 이름도 바꿔야 한다. 괜찮겠지?”

 

물론, 그 아들로 입적하는 과정 중 해랑의 형으로 있을 수 없다는 완우의 발버둥에 진우가 냉큼 완우를 자신의 호적에 올렸다거나 재오가 어떻게 자신이!!하는 얼굴로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아들이 아닌 태원의 동생으로 들어갔다거나 서수혁이 감시 명분으로 양아들로 입적하려다 상부의 눈에 포기했다거나 하는 여러 사건은 넘어가도록 하자. 만약 태원이 들었으면 경악할 일이지만, 지금으로도 충분히 그의 심신에 무리가 왔다.

 

뭐어.. 상관이야 읍지.”

 

시헌이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다른 이들도 딱히 상관없다는 표.... 김 은빈이 격렬하게 발광했다.

 

안돼! 싫어! 싫다고!!!!”

“......”

 

이 무슨 어린애 땡깡? 난생 처음으로 보는 은빈의 외침에 당황스레 바라보았다. 이제는 아예 눈물마저 글썽이며 두 주먹을 꼭 쥐고 도리질을 한... 너 몇 살이라고요?

완강히 거부하는 터라 이쪽은 그냥 그 이름 그대로 쓰기로 하며...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

‘.......’

 

내래가!!”

“...아니, 역시 어린 제가.”

“......으음.. 역시 내가.”

 

말을 꺼낸 해랑과 해진, 진우가 서로의 눈을 째려본다.

이것은 요즘 자주 일어나는 일로.... 일명, 누가 먼저 태원의 병실에 들어가 간호(라기보다 그냥 어리광에 가까운)하는 것인가에 최근 붙은 경쟁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이 경쟁의 승리자는....

 

-달칵

아바지, 몸은 괜찮습네까?”

“.....”

 

조용히 일어나 그네들이 싸우는 것을 버리고 문을 여는 장남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서수혁, 원류환, 김은빈이었다. 뒤에는 그저 패배한 이들을 달래는 완우와 좌절한 이들만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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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의 회복은 굉장히 빠른 편이었다. 그 멘탈도 빠르게 회복하지는 않았지만... 여튼, 몸만큼은 굉장히 빨리 회복해 가족이란 것을 이루고.... 집에 온지 어언 1주일.

태원의 동생으로 들어갔던 재오까지 아들무리에 합세하게 된지 3일 된 오늘.

 

굉장히 어색했다.

 

으음....”

 

감시 명분으로 일찍 온 수혁이 나지막한 침음성을 내며 패배한 5명의 간첩을 보았다.

이유는 다름이 아닌...

 

크흡- ... 왜 부르기 이리 어려운기야!!”

“........”

“.......”

 

태원만 앞에 있으면 아버지라 입이 안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무슨..... ...하아. 수혁은 그네들에게서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태원이 일어난 그 날. 아바지라 부른 류환은 희희낙락 앞치마를 입고 설거지를 하고 있다. 저 녀석은 잘 부르나 보군. 수혁은 다시 좌절하다 못 해 절망한 그네들을 보며 혀를 찼다.

 

마침 달칵-하고 태원이 나온다. 그 품에 안겨있는 또 어디서 주워온 건지 모를 고양이 한 마리가 잘도 야옹거린다.

이제야 안 거지만, 태원은 동물들을 꽤 좋아한다. 뭐라나...

 

뒷통수 맞을 걱정이 없잖아.’

 

하고 말했었지. 수혁은 쓰게 웃었지만, 지금 풍경을 보면... 이거도 나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수혁은 언제 끼리끼리 모여 좌절했냐는 듯이 제 할 일을 하는 그네들을 보며 콧웃음을 치며 태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 , 왔나?”

 

말끄러미 고개를 들어 자신을 보는 모습에 이제야 조금 눈치 채고는 한다. 쑥스러운 기색. 태원은 자신을 아버지라 부를 때마다 어쩐지 조금 기쁜 기색이나 쑥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아직 그걸 눈치채지 못 한 녀석들을 비웃으며 수혁은 국정원으로서 달련된 매끄러운 면상에 웃음을 띄우며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한다.

 

며칠 전 뭐라 말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하던 것이 하루 일과의 마지막이 되어갔다.

자신이 오늘 있던 말을 하면 조근조근 들어주다가도 눈가를 찡그리며 훈계라던가 무엇을 해야할지 조언을 한다. 그것이 그리 좋을 수가 없다.

 

류환이 천천히 태원에게 와 차를 건넨다.

 

태원은 어색하게 그 차를 받아든다. 태원의 무릎에서 펄쩍- 내려온 고양이가 냐-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해랑의 개와 투닥인다. 그와 동시에 언제 침울했냐는 듯이 재오와 해랑이 다투기 시작한다. 그 꼴을 또 해진은 한심하게 보고 은빈은 어느 새 다가와 태원의 옆에 앉는다. 시헌이 한 숨을 쉬며 집에 들어오는 완우를 맞이한다.

완우 뒤로 언제 왔는지 진우가 따라붙는다. 그 뒤로는 해진의 동생이라는 해연이 인사를 하며 들어온다.

 

태원은 그 모습을 저도 모르게 말끄러미 본다.

 

... 얼마나 평화로운 나날일까?

마치, 한 달 전의 그 날이 꿈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그 숨막히던 나날들이 꿈일까? 태원은 조심히 자신의 손에 들린 잔을 만지작거렸다.

 

해진과 해연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여자에는 완전 쑥맥인 재오가 얼어붙는 소리와 그걸 놀리는 해랑의 소리도 들린다. 수혁의 한심하단 한숨소리도 들린다. 진우의 낄낄대는 목소리와 해랑을 말리는 완우의 당황하면 더듬거림도 들린다. 류환이 해랑의 머리를 쥐어박는 소리와 은빈이 멀뚱히 바라보다 자신의 발에서 바르작거리는 고양이와 노는 것도 알 수 있다. 이제는 해진까지 놀리는 해랑을 해연이 깔끔한 뒷차기로 때리는 걸 시헌이 받아내는 것도....

 

아버지!!”

 

평소에는 부르기도 부끄러워하던 호칭을 냅다 부르며 해랑이 태원에게 달려든다.

태원은 천천히 자신의 손에 있던 잔에서 고개를 들었다.

 

.”

 

저도 모르게 지어지는 웃음이 따스하다.

숨막히던 과거가 아스라할 정도로 뜨뜻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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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랑은 보컬 오디션에 합격해 아무렇지도 않게 가수 지망생이 되어 활동하고 있다. 뭐라나, 국정원 이미지 개선 사업 어쩌고 하는 것도 하고 있다고 들었다. 해랑 개인적으로는 리무혁에게 뒤목잡고 쓰러지는 모습이 꼭 보고 싶어서 한다고 하지만.... 자기도 꽤 재미있는 모양이다. 완우는 그 매니저를 맞아 이리뛰고 저리뛰고 한다고 한다. 해랑을 보좌할 수 있다고 좋아하는데 그 어찌 말릴 수 있겠는가....

해진은 학교에 다닌다. 아직 어리다는 것도 있고 해서 졸업 후 국정원에서 일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 학교에서 해연과 같이 다닌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연이 그 학교에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진우의 빨갛게 올라온 볼을 보면 예상이 간다.

류환은 국정원 일을 하면서도 번역 쪽 일을 맞고 있다. 아무래도 국정원 일을 어느 정도 하고 나면 번역가 일을 하고 싶은 것도 같다.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해진이 볼을 붉히며 말했다.

시헌은 예상 외로 국정원 일이 꽤 잘 맞는 것 같았다. 정보 쪽 일을 맞았다는데... 어쩐지 점점 진우를 닮아가서 가끔 위를 잡게 한다. 곤란할 정도로 닮아가면 안 되는데....

은빈은... 좀 곤란했다. 심리상담사에게 갔더니 애정결핍 판결을 받았는데.... 그래서인지.....

 

“......... 떨어지면...”

“.......”

 

태원에게 꼭 붙어있다.

그래도 할 일을 잘 하는 것이 그 누구보다 착실하다. 게다가... 생각지도 않게 요리를 정말 잘 하는 편이었다. 현재, 국정원 일과 집안의 밥을 류환과 함께 책임지고 있다.

재오는 해랑이 딴따라를 한다는 말에 한 동안 충격 받은 것 같았다. 그러더니 한 동안 방에 처박혀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그걸 또 어떻게 알았는지 진우가 와서는 냉큼 들어가 무슨 말을 한 것 같다. 그러자 달칵-하고 나온 재오가...

 

“....내래... .. ... ...아버지(가장 부르는 것을 어려워하고 있다.) 호강시켜 드리갔어요.”

 

라고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진우를 따라 나가선 보디가드 쪽 일을 맞고 있다고 한다. 뭐라나 무슨 사범 일도 같이 맞고 있다는데.... 가끔 태원의 통장으로 상당 금액이 재오의 이름으로 들어오고는 한다. 처음 태원이 받았을 때를 수혁은 기억한다.

 

“.......!!!!!!!!!!!”

 

얼굴을 하얗게 물들이고는 전화를 잡고 무슨 일이냐, 뭔 일을 하는 거냐, 이게 뭐냐 등등 횡설수설하며 걱정하는 모습에 해랑이 패배감을 느꼈다나 어쨌다나. 여튼, 그 날 재오가 오자마자 여직 질린 얼굴의 태원이 한 동안 재오와 대화를 했다고 하는데.... 수혁은 머리를 긁적였다. 상부에는 뭐라고 보고하지?

 

수혁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하네?”

... 아버지.”

 

이제 더 이상 아버지라고 부르는게 어색하지 않다.

처음에는... 그랬다. 수혁은 아비의 그림자에서 벗어났지만, 어쩌면 그랬기에 반대로 태원에게 죄책감을 느끼던 걸지도 모른다. 그 떨어지는 모습에서....

 

태원이 일어난 그 날.

수혁은 류환이 태원을 아버지라 부를 때 무심코 부러움을 느꼈다.

그렇기에 류환 다음으로 태원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자신의 그 부름에 태원이 묘한 미소를 보였지만... 수혁은 꽤나 만족하는 편이다.

 

물론, 예상치 못 한 썩을 형제들이 수두룩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쉬엄쉬엄 해.”

 

토닥이는 손길이 다정하다.

지내는 동안 알게 된 김태원은 서류에서 느끼던 것과는 꽤 많이 다른 남자였다. 오히려 그 날... 자신의 눈을 가리던 그 사내에 가까운 남자였다.

 

. 그 시간에 일어나야 한다-하지 않으면 대체로 태원은 아침잠이 많았다. 게다가 의외로 저혈압이라 아침에는 뚱-한 얼굴을 자주 본다. 음식은 고만고만하게 하는 편인데... 어쩐지 매운 것을 꽤 좋아하는 지라 위에 구멍 뚫렸다는 것을 아는 아들들로서는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쉽게도 아버지의 음식을 포기하고 은빈과 류환이 국자와 주걱을 쥐었다. 그 날 해진이 울었더랬지?

 

수혁이 픽-하는 웃음을 내자 태원이 물음표를 띄우고는 자기 다리에 발을 올리는 해랑의 개를 천천히 안아 들었다.

 

그러고보니 류환과 해랑, 완우, 재오, 시헌은 좀 있으면 군에 입대한다던가? 수혁은 심리 상담가에게서 애정 결핍 판정을 받아 입대 날짜가 뒤로 물린 은빈의 해맑은 얼굴을 떠올리며 음울한 그네들의 얼굴도 같이 떠올렸다.

 

“...날씨가 좋네요.”

“....”

 

태원과 함께 보는 밖의 날씨가 해맑다.

평화로운 나날이다.

 

-시헌까지 드디어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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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아버지라고 부르기까지(부제: 아바지, 아부지, 아버지, 아바이 .....아빠?)

 

당신을 처음에는 어떻게 불렀더라?

교관님, 총교관 동지, 대좌님, 대좌 동지.

 

지금은....

-원 류환

 

처음으로 태원을 아바지라고 불렀을 때의 감각을 기억한다.

그 기묘한 울림. 기묘한 떨림. 기묘한 두근거림.

 

“......”

 

류환은 저도 모르게 자기 목을 쓰다듬어 보았다.

이 목으로 소리를 내어 말했다.

 

어쩐지 얼굴이 벌게지는 느낌이야. 하고 류환을 얼굴을 감쌌다. 그 순간에는 느끼지 못 했던 부끄러움과 쑥스러움,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자부심이 불쑥 고개를 디민다. 어쩐지 태원이 해주던 말캉한 계란말이에 폭 쌓인 느낌이다.

 

약간 벌게진 얼굴이 진정 되었을까?

마침, 앞에 환자복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태원이 보인다. 염색했던 머리카락은 북으로 올라갈 때 다 잘라버렸는지 희끗한 특유의 고동색 짧은 머리카락이 보인다. 류환은 저도 모르게 입매를 끌어올린다.

 

태원이 눈뜬 모습을 봤을 때의 감각을 기억한다.

왜 그 때 물기어린 눈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왜 죽이겠다는 자신들을 살리고 자살을 하려 했는지 알지 못 한다. 왜 그런 다녀왔다-라고 말했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그저.. 그저 어렴풋이 가슴으로. 그래, 가슴으로 이해할 뿐이다.

그저 깨어나준 당신에게 감사한다.

남에서의 그 몇 달이 다시 찾아온다.

 

그 순간을 평생으로 만들고 싶다.

주머니에서 조심히 꺼낸 통장에 잔잔한 구멍가게 순임의 평범한 정이 흐르듯, 그렇게...

 

살 것이다.

 

 

저 앞에 뒷머리를 긁적이는 등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이 말이 이렇게 따스한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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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그렇게 불러보고 싶었어.

-리 해랑

 

끄앙!”

“....”

 

옆에서 완우가 안절부절하며 해랑을 본다. 그 갈 곳 없는 손이 바닥을 쓸며 무언가를 내던지듯 좌절하는 모습의 해랑에게 보일 리 없다는게 안타깝다.

 

내가 놓치다니...”

“.....조장 동지.”

 

해랑의 그 모습에 완우는 안절부절하며 곤란해한다.

 

내가...”

 

내가를 반복하던 해랑이 드디어 주어를 내뱉는다. 그 얼굴이 금방이라도 질질 짤 것 같다고 시헌이 허둥대며 동조하는 완우의 등을 보며 신랄하게 웃으며 생각했다. 느이 뭐하네? 콩트? 콩트가? 남으로 와서 더 짜게 변하는 시헌이다.

 

내가 첫 아바지호칭을 놓치다니!!!”

“..크흡, 조장 동지.”

 

.. 그러지 마, 니들. 쪽 팔려 죽겠다는 표정이 된 시헌이 그네들의 등을 보며 혀를 찼다. 저 바보들을 구원 하소서- 그 구원 하나님도 하기 싫어하실 것 같다. 결국 시헌이 다른 감시자한테(아직 시헌의 그 통수를 기억한다.) 갈 때까지도 해랑은 끄앙-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고조, 그러면 지금이라도...”

“......”

 

해랑이 조용히 얼굴을 감쌌다. 완우가 더욱 안절부절 못 하며 얼마나 상심이 크시면..하는 눈으로 본다. , 잠깐만. 그건 보모의 심정인데? 마침, 시헌을 낚아 가던 수혁이 완우와 해랑을 번갈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혁이 조용히 일 없는 완우를 질질 끌어가고 나서야 조용히 손을 땐 해랑이 꿍얼거렸다.

 

... 부끄럽게....”

 

솔직히 해랑으로서도 이상한 이유이긴 했다. 5446부대에서도 얼굴에 철판 깐 걸로 유명한 자신이 고작(?) 이런 일로 부끄러워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조심스레 입을 가리고 벽에 등을 기댄 해랑이 꿍얼거렸다. 귀 끝이 여전히 붉다.

 

뭐랄까... 그렇지만, 쑥스러운 걸? 해랑은 지금까지 태원과 지낸 생활을 떠올려보았다. 그 중 태원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거나 꼬마야-라던가 꼬마 동무-하고 부른 적은 있었지만... 글쎄, 자기가 그를 부를 때.. 딱히 호칭을 넣어 부른 건 5446부대에 입대하고 나서부터던가?

그도 그럴 것이... 그와 있을 때는 언제나 단 둘. 그 외에 누구 하나 더 해진 적 없었다. ... 마리로 닭이 있던 적은 있었지.

 

‘...고 놈 참 맛있었지.’

 

해랑이 쓰게 웃고는 만다. 맨날 그를 아비라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입에 내 본적 없구나. 한심한 느낌이야.

 

해랑의 입매가 축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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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은.

그래, 태원이 국정원과 대화랄까, 현재 북한이 진우와 그 일당들이 태원이 넘긴 정보와 자신들이 수집한 정보를 터트린 덕에 아수라장을 방불케 해 딱히 태원이 정보를 내뱉는다 해도 쓸모가 없는터라 생각보다 쉽게 면담을 끝내고 그네들의 배웅 겸 야근하는 수혁이를 도닥이고 온 날이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태원은 방 문 앞에 청승맞게 쭈그려 앉아 손가락으로 바닥에 한 없이 원을 그리는 해랑을 보며 조용히 생각했다. 애는 가면 갈수록 청승맞은 캐릭터가 되는거지? 리무혁... 리무혁이가 문제인건가? 모든 재수 없음과 머피의 법칙과 불운은 아무래도 리무혁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참고로, 그 리무혁은 현재 실직 위기에 놓여있다고 한다.

 

“.......”

 

조용히 부엌으로 들어간 태원이 냉장고를 열어 보았다.

해랑이 어렸을 적... 딱 한 번..... 주려다 만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그 때가 해랑이 즈이 집 본처 아들내미가 먹던 것을 부러웠노라 말했던 때던가? ... 나중에는 꽤 알아서 잘 빼돌려(!) 먹었다 자랑하는 모습에 조용히 봉인한 것으로 기억의 끝에 쓰게 웃으며 리무혁을 욕했던 것을 기억한다.

 

“...마셔.”

“..?”

 

-하고 내밀어지는 머그잔에 해랑이 눈을 동그라니 뜬다.

그는 오늘 국정원들과 대판 싸우고 오는 길이었다. 으아니, 내가 군대라니! 군입대라니! 지금까지 군대에 짱박혀 있었는데!!! 대한민국 국적 땄으면 으레 격는 행사다-하고 말하던 수혁의 얼굴이 참으로 얄밉고... .... 해랑은 다시 울먹해지는 눈으로 태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태원은 그런 일 모를뿐더러 수혁과 국정원 나름대로 나이(!)를 생각해 패스당해 군대 자도 못 들은 태원으로서는 알리가...

 

“..고민이라도...”

“...... 아부지.”

 

, 임마? 순간 태원이 해랑을 쥐어박으려 했다는 것은 비밀로 해두자.

그날 태원은 자신의 허리에 매달린 해랑에 한 동안 씨름을 해야했다고 한다.

 

아부지.. 어허허허헝! 군대가기 싫습네다!!!”

“......넌 그냥 가라, .”

끄어어어어어엉!”

 

그리고 덤으로 빼꼼-히 내밀어진 기타 등등의 부차적이니 아들이라 쓰고 짐덩어리들이 들러붙은 것은 말 못 할 고난이었다.

 

끄허허허허허허헝!”

....”

“.....”

 

류환의 그 울먹한 눈은 참기 힘들었다 훗날 태원이 고백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랑의 그 울음소리도.

 

아부지!!! 으허허허허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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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불러야 할까?

-리 해진

 

그날.

자신의 허벅지를 치료해주던 그날.

 

당신을 여전히 총교관 동지라고 불렀다.

 

‘....아들.. 입적.’

 

종이 한 장으로 가족으로 묶였다.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오늘 처음 알았다.

 

그날.

그 어깨에 울음 쏟던 그날.

 

당신을 여전히 교관 동지라고 불렀다.

 

‘.....’

 

이 두근거리는 가슴은 비단, 경애해 마지않은 원류환 조장님과 해랑 조장과 가족이 돼서가 아니다. 종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날.

남에서 만나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게 된 그날.

 

당신을 대좌 동지라고 불렀다.

 

“-.”

 

구겨진 종이를 조심스레 핀다. 그 종이 위의 글자를 다시 하나하나 보고 얼굴을 붉히고 만다.

 

그날.

쪽지 한 장 달랑 놔두고 사라진 그날.

 

당신을... 나는 뭐라고 불러야 했을까?

 

“.....”

 

보호자 이름이 써져있는 곳에 시선이 계속 멈춘다.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조심히 떼고 서류를 투명 파일에 껴 조심히 책장 틈에 끼어놓는다. 모두와 같이 살게 된 집은 꽤 좋았다. 방도 넉넉해서 3명이나 2명씩 같이 살아도 모자르지 않을 만큼 넓었다. 수혁의 말로는 개축공사를 한지 별로 안 되었다고 한다. 뭐라나.... 국가 소유로 있는 곳인데 감시 겸 해서 넓혔다나? 여튼, 딱히 몰라도 될 것 같은 말이라 대충 듣기는 했던 것 같다.

 

...실은 이곳에서 태원과 같이 살거라는 그 말에 몽롱해져 제대로 못 들었다.

 

“.....”

 

그래도 학생이라고 자신에게 책상이 있는 방과 특별히 류환과 같이 쓰라 방을 내준 수혁에게 조금.. 아주 조금 고마운 마음도 있다. 문제는 그 썩을 놈의 이중간첩께서 태원과 같이 방을 쓰겠다 선언해서 빡쳤..... 해진은 말을 골랐다.

되도록 당신에게 좋은 말만 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다. 이제는 다 컸다 말해주고도 싶다. 이런 걸 뭐라고 해야할까?

 

-똑똑

리해진이, 밥 먹으로 나오라우.”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요즘 익숙해지기 시작한 재오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고 대답하며 문을 열며 나오니 구수한 냄새가 난다. 수혁은 꽤나 일이 고된 것 같았다. 5446부대에서도 보기 힘든 초췌한 모습이 돼서 올 때가 종종 있어 황재오가 기겁하는 모습(? 남에선 뭔 훈련을 하는기네?! 야근.)을 보고는 한다.

 

잘 먹겠습니다.”

 

실은 조금 아쉽기는 하다.

분명, 맛있는 밥이고 반찬 투정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은빈(남파 역이 분식집 주인)과 류환(순임에게 조교된 숙달된 재료손질)의 음식은 맛있었고, 북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좋았다. 단지..... 해진은 태원과 살던 그 집의 밥이 떠오르고는 한다. 태원의 위를 생각한다면, 이게 맞겠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한술 국을 떠 마시며 힐끔- 태원을 본다.

오늘은 말해야지. 말하고 싶어. 말할 수 있을까? 소곤소곤. 안에서 작은 소리로 고민한다. 뭐라고 불러야할까? 그것은 이미 자신이 소중히 투명한 파일 안에 넣어놨던 서류가 말해준다.

 

...”

 

조심스레 입을 떼어본다. 그러자 순식간에 시선이 몰린다. ...이건 좀 안 좋은 것 같다. 생각하면서도 왠지 간질한 가슴을 참을 수 없어 내뱉고 만다.

 

아버지.”

“........ ...?”

 

당신도 아직은 익숙지 않은 걸까? 국 한 수저 뜨며 뭔가 맘에 안 드는지 눈가를 조금 일그러뜨리다 몇 초 후에 인식하고 고개를 드는 당신에 조금 웃고 만다. 다른 이들 전부 날 주시하는데도 꼿꼿이 국을 뜨던 당신이 사실은 꽤나 어벙하다는 것을 당신과 생활하면서야 겨우 알았다.

 

다시 조심히 입을 연다.

 

.. 내일부터 다시 학교갑니다.”

“....”

 

그리고 고민하는 당신이 기쁘다.

 

아버지.”

“...?”

 

아뇨, 그냥요.”

“...?”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지금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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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겠다.

내가.. 불러도 되는 걸까?

-박 시헌

 

“....”

 

솔직히. 시헌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5446부대 최고의 열린 마인드, 유연성이 넘치다 못해 흘러흘러 딴 길로 세기도 한다는(!) 박 시헌이 아닌가?라기보다 그냥 이러나저러나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던 것뿐이지만.

 

“.....

 

시헌은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이 어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찌보면 리해진이야 말로 가장 합당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순수하리만치 깨끗한 적의와 경계어린 눈이야 말로 정당한 것이다.하고 시헌은 생각했다.

 

그러니 자신의 손에 들린 이 종이는 시헌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것은 당연.

겨우 이런 종이 한 장으로 내가 당신 아들이 된다고? 내가? 시헌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당신의 등을 찌르기 위해 휘두르던 가오리도 그 은빈의(이제야 알았지만) 총알이 아니었으면 가만히 찔렸을 당신도 뒤로 넘어가던 당신도 아직 눈에 훤하다. 그렇기에... 시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근거로 자신이 안전해졌다 생각하는 걸까? 무슨 근거로 자신을 풀어준 걸까? 무슨 근거로 그네들은 자신에게서 경계를 푼 걸까?

 

“....... 그만두자.”

 

더 이상 생각하기에는 역시 자신의 머리가 딸린다. 어려운 문제를 본 학생이 그렇듯 조용히 책을 닫듯이 생각을 닫은 시헌은 창 너머의 맑은 하늘을 보았다. 하늘을 나는 그네들이 참 자유로워 보인다. 날아가는 그 모습이 참으로 좋다. 그렇게 생각한다.

 

닫은 생각처럼 시헌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예를 들자면, 왜 태원이 자살하려 했는지. 왜 태원은 그 한 달 동안 일어나지 않았는지. 왜 태원은 다녀왔어라고 말했는지. 왜 태원이 그날 머뭇거리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는지.

 

그냥... 그래, 그냥.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놓치기에는 안타까운 이 시간을.

 

-!”

 

벌떡 일어난 시헌이 이번에 만난 진우-라는 사내를 떠올렸다. 흥미가 샘솟는 이였다. 생존에도 꽤 도움이 될 것 같고... 무엇보다도.

 

“.....-”

 

히죽. 웃는 모습이 꼭 진우의 악동어린 미소와 닮았다. 아마도 태원이 본다면 벌써부터 위를 부여잡지 않을까?

 

-”

 

문을 열고 나오면 태평히 고양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개를 발밑에 놔두고 소파에 앉아 바보상자를 보고 있는 당신이 보인다. 저도 모르게 입이 열리며 가장 익숙했을 말을 내뱉고 만다.

 

 

 

아바이 동무, 뭐하는 급니께?”

 

그러면, 당신은 딱!하고 꿀밤을 놓고는-

 

말투 고쳐.”

 

라고 말하겠지.

이 하루가 달다고 느끼는 것에 감사한다.

 

생존보다 중요하다고 느끼고야 마니까.

 

그치만, 꿀밤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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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그 때부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서 수혁

 

그날.

그래, 그날. 아비의 뼛가루를 뿌린 그곳에서 당신의 서류를 태우던 날.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고는 한다.

 

“....하아

 

뱉어내는 담배 연기가 쓰다고, 술이 달지 않다고, 하루가 지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날이 언제부터 였을까.

 

말이지.... 인생이라는건 그런거야. 그게 어른되었다는 거라고!’

 

술을 퍼마시던 어느 상사가 했던 말이였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남으로 돌아왔을 때.. 축하였던가... 무엇 때문 이었던가 끌려가 술을 마실 때... 아직, 내려온 그 날조차 실감나지도 않던 그때에 들었던 말이었던 것 같다.

 

남으로 와 처음 마신 커피는 썼다.

그저 쓸뿐인 커피를 왜 마실까, 그저 취할 뿐인 술을 왜 마실까, 그저 독하기만한 담배를 왜 필까. 가끔 무심코 드는 생각과 함께 당신을 떠올린다.

 

언제나 하는 조사와는 다르다. 떠오르는 당신은 언제나 서류와의 괴리감을 갖았다.

서류의 당신과 내가 만난 당신.

 

아버지.

 

‘...실은 사죄하러 갔었던 건지도 몰라.’

 

그 뼛가루 뿌렸던 그곳에.

야근으로 지친 머리를 손에 든 커피 잔에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쓰다 생각했던 커피가 이제는 그 속에서 나름의 달콤함과 향긋함을 찾았다.

 

인정하기 무서웠었다.

당신을 그렇게 부르면 마치 내 돌아간 부모님들을 배신하는 것 같아, 무서웠다. 그렇잖아? 무려, 아비를 죽인이다. 그런 사람에게 아버지-라고 부른다는게.... 일방적으로 가당키나 한가? 그러나 그 고민을 하기도 전에 수혁은 떠올리고 만다.

 

떨어지는 모습, 총구를 머리에 디밀던 모습, 자신에게 서류를 맞기던 모습, 그 씁쓸한 목소리, 눈을 감기던 손, 감정이 묻어나는 토닥임......

 

죄책감 짙던 눈까지.

 

쓰디쓴 그 눈까지 생각이 다달으면... 이제는 그만 쓴 웃음을 토해내고 만다.

북에서 내려와 남에서 생활하다 다시 만나고나서야 당신을 제대로 알게 된 것 같다고 수혁은 참회하듯이 속으로 고백한다. 당신은 제 생각보다 부서지기 쉬운 사람이었다는 것도, 그 악랄해보였던 눈이 실은 굉장히 다정하다는 것도, 누군가를 죽이기 위한 손에 얼마나 많은 걸 견디고 있어야 했는지도...

 

겨우 남으로 와 쉬고나서 당신을 다시 보고나서야 깨닿았다.

요즘 이런 생각도 한다.

 

만약... 당신이 남으로 내려오지 않고 적으로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

일하자.”

으윽-”

“....살인적이예요, 팀장니임......”

 

쳐지는 국정원 팀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유격훈련이나 특공훈련보다 무서운 서류와 마주한다.

조심스레 생각의 문을 닫는다. 만약...을 닫는다. 지금이 중요하다. 그렇기에 부모님께 간소한 사죄를 들인다. 분명, 죽는 그 한 순간 아비였던 국정원과 그 아내였던 어미라면 이해해주리라. 그렇지 않다면..

 

어쩌겠어. 아들이 그렇다는데.’

 

.... 왜 방금 지진우가 떠오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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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모두가 비상체제였다.

수혁이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하면 이해가 좀 더 될까? 수혁은 혀를 내둘렀다. 진우와 그 패거리는 일을 터트려도 참 화려하게 터트렸다. 너무 화려해서 국제사회에서도 당황할 정도이니... 이거 참. 대한민국으로서도 곤혹스러울 정도였다.

 

그네들은 정말 물불 안 가린 듯이 터트렸다.

그 자료 중에 자신들이 연관된 것도 있을 터인데 아무렇지 않게 터트리고 잠적해버린 녀석들 덕에 수혁은 하루하루가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왜냐면, 그 녀석들 수장이라는 작자가 허구헌 날 태원을 보겠다 남의 집에 무단침입하는데 간이 아주 철렁인다. 이러다 간통죄로 잡혀가는건 아닌지 원... 수혁은 이를 벅벅 갈며 기필코 진우를 잡아 쳐놓고 말겠다 다짐한다. 그러나 오늘도 진우는 유유히 빠져나가리라.

 

수혁은 태원과 간첩들을 감시 겸 전담으로 그 팀 또한 수혁의 바로 옆집이나 앞집으로 그 팀 또한 수혁과 같은 임무를 띄고 있다. 수상한 낌새 시 사살-도 불허하다는 허가도 나왔지만.. 글쎄? 그 팀원들이 보기에는 좀 과격하기는(가끔 재오와 해랑의 격한 KOF를 방불케하는 격투와 살벌한 해진과 쫄아있는 시헌 등) 하지만 꽤나 평범한 집안이었다.

그건, 물론 요 몇 년간 5446부대에 견학(!)갔다 온 수혁의 스파르타하다 못해 와일드한 훈련 모습과 훈련 스케줄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팀원들은 모르는 눈치이다.

 

그런 팀원들과 집 앞에서 헤어지며 피곤한(정신적으로) 몸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간 수혁은 저도 모르게 현관 앞에 멈춰 서고는 한다. 어지러져 있는 신발들. 마침 나오는 감시원과 교대하며(수혁이 없을 때는 두엇이 집에서 감시를 하고 다른 팀이 밖에서 감시를 한다.) 신발들을 바라본다.

 

나란히나란히 되어있는 신발은 아마도 원류환, 리해진. 아예 뒤집어진 운동화는 분명 리해랑. 그리고 그 옆에 살짝 리해랑 쪽으로 기울어진 신발이 최완우. 저기 외따로 존재감 없이 놓여있는 건 박시헌. 다소곳하게 신발장 안에 같이 있는 것은 분명 김태원과 김은빈.

 

“......”

 

조심히 신발을 벗고 신발장 안에 자리를 내어 넣는다. 태원의 바로 옆. . 여기가 좋겠다. 수혁은 고개를 끄덕인다.

 

으음... 이제 왔나?”

 

조금 자기라도 했는지 눈을 비비며 태원이 나온다. 몇 번 깜빡이는 눈이 이내 선명한 초점을 이룬다.

 

“......”

 

저 눈을 보면, 저 상흔을 보면, 저 얼굴을 보면...

계속 계속 떠오르겠지.

 

태원의 오른눈을 가르는 상흔을 주시했다.

그 상흔은 수혁에게 각인과도 같았다. 이 사람을 죄인이다. 간첩이야. 범죄자야. 내가 잡아야 할 증표야. 속살이듯 들리던 그 소리가 이젠 들리지 않는다. 그저 가끔 생각하고는 한다. 저 상처를 얻고 당신은 어땠을까?

 

죄책감이 더 이상 발목을 잡지 않는다. 그 그늘 아래서 벗어났다. 아비의 무덤에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당신에게 한 발짝 가까이 갔다.

 

일어나셨어요..”

 

머뭇거리는 기색의 존댓말이 조금 어설프다.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해 시작했던 호칭이 마음에 든다.

 

 

 

아버지.”

 

고개를 끄덕이며 쉬엄쉬엄하라는 말에 웃음기를 머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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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란하다.

어떻게 그렇게 쉽게.....

-황 재오

 

가장 부르기 곤란했다.

재오는 몇 번이고 머뭇거렸다. 냉큼냉큼 받아먹는 수달(!) 같은 리해랑이나 원류환이들이 참으로 마음에 차지 않았다. 어떻게 그리 쉽게 부를 수 있는 기네? 생각보다 그런 쪽으로 고지식했던 재오는 홀랑 호칭을 바꿔먹는 그네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버지-라니. 재오의 과거 속 들어찬 아비의 잔상은 좋지 않았기에 입 안이 찝찝했다. 솔직히 아직까지도 이리 남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거늘.... 재오는 힐끔, 창 너머의 하늘을 본다.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솔직히 재오는 그 때 진심으로 해랑과 류환, 수혁을 처리할 생각으로 덧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걸 태원은 알았을까? 감시하듯 붙은 완우와 시헌에 꼼짝없이 다른 놈들 뒤처리나 하러 돌아다녀야 했다. ...만약, 그네 둘이 보지 않았다면..... 지금 상황이 무언가 바뀌었을까? 뒷덜미를 긁적이며 손에 들린 총신을 만지작거렸다.

 

맞게 된 보디가드 일은 생각보다 편했다.

아니.. 편하다기보다 적성에 맞았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개인 경호로 돌려놓아서 그런지 다른 녀석들 명령을 들어야 할 필요도 없고, 생각보다 평화로운 남에서 총신을 겨누고 쏠 일은 없었다.

 

“.....”

 

그게 조금 불만이라는 듯 총신을 쓰다듬었다. 몸이 굳는 느낌이야. 재오가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하루하루가 생존에 직결되던 북과는 달랐다. 그게 무척이나 어색했다.

좀 있으면 들어간다는 군이 오히려 편할 것 같다 재오는 생각했다. 국정원의 배려아닌 배려로 짧은 적응 기간을 지낸 후 21개월이 아닌 12개월을 지내기로 타협보았다고(해랑의 깽판과 류환의 청산유수같은 언변으로) 하는데 대신 가장 빡센 부대에 들어간다고 했더랬다. 부디 자신의 생각만큼 빡세기를 빈다고 재오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

 

재오는 마주선 현관문 앞에서 뻣뻣이 굳어버리고 만다. 벌써 몇 주가 되어가는데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조심스레 들어 올린 손을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다.

 

-이라는 건 재오로서는 상상도 못 할 것이었다. 뭐랄까.... 무난하게 넘어가고 마는 박시헌이나 리해랑 빠돌이 최완우나 생각 없는 김은빈이나 남쪽을 그나마 경험한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아직 남파되지 않았었던, 그저 형식적으로 배우기만 했던 재오로서는 남은 별천지였다. 가르쳐주는 것과 겪는 것은 다르다고.... 물론, 그걸 그대로 적용하는 이도(박시헌이라던가) 이었지만, 어떤 의미로 무척 고지식한 재오는 임무 외로 제대로 겪기 시작한 남이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보디가드 일을 할 때는 괜찮은데....

 

혀를 차며 신발을 바라...

 

서수혁이 간나새끼....’

 

재오는 수혁의 신발을 조용히 태원의 신발과 가장 먼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대신 자신의 신발을 올려놓았다. 반짝이는 구두가 무척이나 어색하다.

임무를 맞고 내려왔을 때 입었던 정장과 구두와 비슷한 것으로 했지만.. 여전히 불편한 것은 불편했다.

 

아버지.”

“.....”

 

자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움찔하고야 만다.

힐끔 본 그곳에는 류환이 태원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며 묻고 있었다. 재오는 고민했다. 인사..해야하나? 조심히 눈치를 보듯 눈을 골린 재오가 화들짝 놀란다. 태원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다녀..왔습네다.”

“...”

 

어물쩍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 제길. 어색함이 넘쳐흐를 지경이다.

 

“.....느그 빙신이고?”

닥쳐.”

 

안에 있던 시헌이 보던 책을 내려놓고는 문에 기대선 재오에게 한심하단 어투로 말한다. 잠시 그 꼴을 유심히 본 시헌이 혀를 쯔즛-하고 차버리고야 만다. 이놈은 너무 생각이 많아. 반대로 자신이 생각이 무척이나 없다는 것을 시헌은 눈치 채지 못 한 것 같다.

 

마마- 적당히 하라, 안카네?”

“...넌 말투나 적당히 해.”

 

어색한 남한어를 내뱉으며 어떤 의미에서 정말 남한사람 같은 시헌을 노려보며 재오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런 재오를 이제 콧김을 뿜고 바라본 시헌이 의자에 거꾸로 앉고는 의자 등받이 위에 턱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 고조, 느는 너무 생각이 많다 안카네?”

“....그래서.”

 

짜증스레 묻는 건 그나마 양호한 편이군.하고 시헌은 생각했다. 재오는... 뭐랄까, 굉장히 신경질적인 타입이었다. 신경 쓸 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고, 고민할 것도 많다. 시헌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유형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할게 많은 거지? 생각할 게 많으니 자연 언제나 짜증스러울 수밖에.

시헌은 잠시 그날을 떠올린다. 가쁜 숨을 내뱉으며 태원의 손을 맞춘 재오. 시헌은 태원의 등을 찌르려 했기에 다른 이들과는 다른 감정으로 태원을 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태원을 살린 두발의 총알. 시헌은 어쩌면 자신은 재오에게 빛을 졌다고 느끼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우리는 군인이다 안카네.”

“...?”

 

그게 뭐-라는 표정에 시헌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좀 더.. 받아들이기 쉬운.. ....

 

그니께... 아부지가...”

“...”

 

움찔하는 게 참으로 티난다.

 

우리 상관 아니네?”

“.....?”

바뀐 건 읍스야.”

 

시헌은 히죽 웃고는 재오에게 말한다. 좀 더 생각을 단순히 하라고, 동무.

 

우리는 가족이라는 부대에 있는기고, 대좌는 아버지가 된 것 뿐인기야. 그러니 우린 따르는게 자연스러운거 아니네?”

 

이리저리 어느 곳의 억양인지 말투인지 모를 말을 들으며 재오는 눈썹을 찡그렸다. 뭐라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 처먹겠다. 그러나 대충 그 의의는 알아듣겠군. 재오가 한숨을 쉬며 이부자리 위에 털푸덕 누웠다. 시헌이 좀 벗고, 씻고 자라는 말을 하는 것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 몰라.’

 

 

 

다음 날 아침.

재오는 방문을 열고 마주친 태원에게 어색히 입을 열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네까.”

 

어쩐 일로 일찍 일어난 태원이 수건으로 물기를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일어났다고 해도 꽤나 비몽사몽한 얼굴이었다.

재오가 다시 떠듬떠듬 입을 연다.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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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려운건가?

-김 은빈

 

은빈은 서류를 보았다.

가족관계 서류.

 

달칵. 문을 열고 나가자 개와 고양이의 파이트를 관전하는 태원이 보였다.

은빈은 어느 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아빠.”

 

태원이 들고 있던 개풀을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