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위/조아라]대좌님! 우리 대좌님!-4
Chapter3.움직이는 상처 입은 짐승들
해진이 움직인 것은 깊은 새벽 4시.
모두가 가장 방심하는 그 시각이다. 도둑고양이도 떠돌이개도 둥지를 튼 새도 잠들고 오로지 벌레만이 간간히 우는 그 새벽. 해진은 품에 서류를 품고 달렸다. 이 서류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이 서류에 뭐가 적혀있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이 서류의 무게 또한 모른다.
그러나 이것만큼은 안다.
‘정부’조차 모르는 서류다.
마치 5446부대가 있다는 사실만 증명하는 얇은 문서만큼의 그 묵직함이 품에서 느껴진다.
“........”
그 서류를 어째서 총교관이, 그 누구도 아닌 대좌 동지가, 그 김태원이 자신에게 전하라 하는지 모른다. 리무혁 대장 동지 자식인 리해랑 조장에게 전하라 하는지 자신은 알지 못 한다. 단지, 어렴풋이 이 무게만을 알 뿐이다. 이 무게가 얼마나 클지 그저 조장으로 있었던 그 짧은 시간을 통해 알 수 있다.
“읏-”
정신이 산만해져 밟은 지붕 끄트머리에서 비틀거렸다. 해진이 균형을 잡으며 무릎을 꿇고 숨을 몰아쉰다. 마치- 그래, 마치 이것은 류환 조장님 출정가실 적 그리 뛰었던 숨막힘과 긴박함과도 닮았구나. 그래- 그것과... 이리 흡사하구나.
그러나 그 무게만큼은 어쩐지 더욱 묵직한 것은 자신이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해진의 눈에 어느 새 조용히 불이 켜져있는 해랑의 집이 보인다.
‘조장... 해랑 조장 동지....’
거친 숨결 사이로 류환 조장님 가시는 길 배웅하기 위해 달렸던 그 길. 마주쳤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아- 하고 터져 나오지 않는 숨이 아릿하게 목이 매인다. 무릎을 손을 올려 바로 서며 조심히, 조용히, 그래- 마치.... 류환 조장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조심히 해랑의 집에 발을 디뎠다.
이 가는 발걸음이 무척이나 무겁다.
숨막히도록.
-----------------------------------
“기래, 뭔 일이기예, 이 오밤중에 내래를 찾아왔네?”
싱글거리며 웃는 얼굴을 보며 얼굴을 굳히며 들어온 해진이 어쩐지 허탈해졌다. 아, 이런 사람이지 해랑 조장은.... 나오는 한숨을 참지 않는다.
“으익! 뭐네? 왠 한숨을 그리쉬네?”
“해랑 조장이 한심해서요.”
“켁!”
얼굴을 와작 일그러트리면서도 웃음을 지우지 않는 모습이 참으로 짜증날 따름이라고 생각하며 어쩌면 이리도 류환 조장님과는 딴판일까 혀를 찼다. 고조, 조장하면 진중함 아니간? 해랑의 노란머리에서 이미 글러먹은 일이었다.
“전해드릴게 있습네다.”
“읭? 지령이네?”
얼굴을 삐쭉이는 꼴이 꼭 심심풀이 푸닥거리를 들은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진은 조심히 자신의 품에서 서류를 천천히 꺼냈다.
갈색 봉투에 봉인되어있는 서류가 어쩐지 무겁기 그지없다.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으엑- 하필 서류네? 내래는 사무직과는 영 아닌데?”
근데, 왜 흑룡조장이 해랑 조장인데요. 한숨 같은 탄식이 흘러나온다. 아.. 걍 단순하게 암기 쪽이라 그런 것인가? 해진은 답을 찾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해진이 방금 전까지 긴장감을 털어낸 것에 비해 해랑은 실은 봉지 끄트머리를 보자마자 이를 아려물었다. 봉지의 봉인 방식이 눈에 익었다. 너무나 익었다. 해랑은 실실 웃으며 해진을 힐끔 보았다. 그러며 지나가듯이 물었다.
“이기 누가 보냈네?”
“아- 총교관 동지입네다.”
해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해랑은 자신의 짜증나는 직감을 느꼈다. 원래.. 그래, 원래 특히 안 좋은 것에는 더더욱 감이 잘 맞는다지? 해랑의 눈가가 일그러진 웃음을 만들어냈다. 내래... 아직 수행이 부족한가 보구만, 기래? 그의 입가가 바르르 떨렸다.
잇새로 망할-하는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
“.....”
바스락-
종이의 맞부딛이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히 뜯어진 봉투 안의 하얀 종이가 해랑의 손에 들린다. 조용히 그 한 순간의 봉투가 뜯어지며 난 종이의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 종이가 빠르게, 그리고 천천히 넘어간다.
“.........”
“............”
넘어가는 종이 한 장, 한 장이 해랑의 눈을 아리게 박힌다.
그의 입가에 새겨져있던 미소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간다. 어두워지는 그의 낯에 해진의 마음에 커다란 돌이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뭘까- 뭐가 그 하회탈 최진우 동무와도 맞먹던 해랑 조장의 얼굴을 저리 만든 걸까. 해진의 무표정한 얼굴이 불안으로 물들듯이 흔들리는 눈에서부터 파란 일렁임이 일어난다.
“너. 이거 읽었네?”
“아뇨.”
“..기래?”
서류를 다시 봉투에 넣는 해랑을 보며 해진은 눈을 깜빡였다. 해랑은 자신의 기타 케이스에 그 서류 봉투를 넣는 그 때까지도 얼굴이 굳어있었다. 해진은 처음으로 보는 그 무표정하고 굳은 얼굴에 떨려오는 긴장이 숨막히도록 참을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당장이라도 해랑 조장의 팔을 부여잡고 무슨 일이냐, 왜 총교관 동지가 올라간거냐, 그 서류는 뭐냐- 그리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그를 붙잡은 것은 ‘해랑에게 주라우. 그럼 될 거야.’ 그리 말했던 총교관의 말이었다. 그러나 이 엄습하는 불길함은 무얼까... 마치, 그래 마치, 조장으로 있을 적 그의 귀를 어지럽혔던 소문처럼 불길하다. 그 불길함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가.
저 서류? 그도 아니면 총교관 동지? 해랑의 굳은 표정?
아니면 그 똑똑한 머리가 짐작케 한 그 혹시나?
“....뭘 그리 굳었네?”
툭-하고 해진의 머리에 손이 떨어진다. 해진이 그제야 자신이 숨을 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하고 내셔지는 막힌 숨에 해진이 해랑을 올려다본다. 해랑이 방금 전의 그 굳은 표정은 거짓이었다는 듯이 낄낄거리며 해진의 쥐색 비니 위에 손을 올려 헤집는다.
“...어, 근데 이기 뭐네?”
“...?”
해진이 눈을 깜빡였다. 뭘 말하는 걸까? 해랑이 어쩐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자신의 손에 닿은 쥐색 비니를 조심조심 쓸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이기 내래가 원류환이에게 뺏긴 비니 아니네?”
해진의 얼굴도 굳었다.
급히 몸을 틀어 해랑의 손에서 멀어진 해진이 눈을 번뜩이며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한다.
“이제 제겁니다.”
“뭐..뭐라는 기네?!”
해랑이 성을 내며 성큼 다가오자 해진이 발을 뒤로 빼며 당장이라도 한 바탕 할 사람마냥 자세를 잡는다.
“어차피 총교관 동지 꺼 아니었습네까? 그러니 제겁네다.”
“허- 어디서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기네? 좋은 말 할 때 뱉으라.”
해랑의 눈이 답지않게 진심으로 진지하다. 해진의 눈도 진지하다.
탕-
“거- 자라!!”
얇은 벽을 발로 차며 짜증내는 소리에 해진이 빠르게 뒤에 있는 문을 열고 빠르게 튀어나갔다.
-탁!
“...헐.”
그 날랜 모습에 해랑이 눈을 깜빡였다. 거.. 겁나게 날래네. 이미 저 멀리까지 사라진 해진의 뒷모습을 보며 자신의 한 손을 쥐락펴락하며 허탈한 숨을 뱉었다. 뭐네... 이기, 리해랑이가 뺐긴거네? 허- 해랑은 자신의 손에 있었던 비니의 감촉과 그 아래의....
“쩝-”
어린 조장의 작은 두상을 떠올렸다.
그의 낮이 달 없는 밤이라 그런지 어둡다.
‘...김 태원 대좌 동지. 당신은 무슨 생각입네까?’
문턱 등을 대고 바라보는 방 안에 널브러진 기타 케이스가 보인다.
자신이 떠나올 적 태원이 했던 말이 귀를 아릿하게 만든다.
‘내래.... 느그한테 읽어준 책... 말... 기억하네?’
그는 무슨 생각으로 그 많은 책들을 무작정 어렸던 자신에게 읽어준 걸까. 갑자기 이제야 든 의문이었다. 그가 읽어준 책은 굉장히 많았다. 종류와 계열 불문하고... 그래, 심지어 금독서로 지정된 책조차 있었다.
‘-원래 매도 일찍 맞아야 편한 법이야.’
“...............”
해랑은 툭-하고 문턱에 머리를 대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겨우 검은 구름 밖으로 얼굴을 살짝 내민 달이 보였다. 마치, 해랑 지금 자신의 얼굴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찌푸려진 자신의 얼굴.
“당신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그 때 한 겁네까....
아바지.
===================================
“뭐? 올라가셨다고?”
당황하는 류환의 말에 해진이 고개를 끄덕인다. 해랑도 그건 몰랐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뜬다. 침울해진 해진의 머리를 툭툭- 류환이 치듯이 쓰다듬고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해랑은 그들 눈이 닿지 않는 사이 얼굴을 검게 굳혔다. 무슨 일이네, 이기..... 해랑은 속이 답답해오는 것을 느끼며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
“아- 진짜!!”
평상에서 머리를 쥐어싸고 박박 긁는 해랑을 보며 류환이 혀를 찼다. 순임 슈퍼 할매의 ‘그래서 죽갔냐? 이놈아!’하는 그 소리가 떠올랐다. 쯧쯔- 류환이 해랑을 발로 밀어낸다. 너 가라. 좀 가. 해랑이 억울한 눈으로 류환을 쳐다본다.
“뭐.”
“...느그 총교관 동지 닮아가는거 아니네?”
“....아?”
띠거운 얼굴을 하던 류환이 눈을 휘둥그레 뜬다. 닮아간다고? 누가. 누굴? 류환이 눈을 깜빡였다. 반쯤 억울함과 슬픔이 담긴 눈에 류환은 눈을 깜빡였다. 그의 시선이 해진에게 향했다. 해진의 낯이 굉장히 어두웠다. 혼란과 갈 곳 잃은.. 그래, 언제인가 태원이 했던 길 잃은 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어린 18살의 나이. 고향도 놔두고 최연소로 목숨을 걸고 올라선 조장자리까지 버리며 이곳까지 내려오게 한 원동력은 뭘까.
류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원류환이.”
“..네..네?”
자신의 어설픈 대답에 툭-하고 머리 위에 손 하나가 턱-하고 올려졌다. 크고 두꺼운 그리고 상처 많은 손이 슬슬 자신의 더벅머리를 헝크른다. 그리고 딱!
“억!”
“머리는 좀 깜지?”
“어.. 그게- 설정상...”
태원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런 건 알아서 조절하는 거 ㅂㅅ아.’라고 말하고 있었다. 류환은 어쩐지 지금까지 해온 행동들이 말짱도루묵이 되는 느낌이었다.
태원이 한숨을 쉬며 그런 류환을 바라보았다. 이놈은 원체 맹하다기보다 띨했다 그리 생각하며 슥슥 자신의 옷에 손을 닦았다. 자신의 무릎 위에 아장거리며 웅얼거리는 애기가 참으로 평화롭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태원이 마른 하늘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
“...?”
그런 애기를 여전히 신기하단 눈으로 잡지도 못하는 손으로 자신에게 바둥대는 고사리 손을 바라보며 움찔거린다.
“리해랑이랑 리해진이 어떻게 생각하나?”
“......?”
난데없는 말이었다. 무슨 뜻이 있는 말일까? 눈을 꿈뻑인 류환이 잠시 생각을 골랐다.
리해랑이랑 리해진....
“리해랑은... 잘 모르겠습네다. 특히, 남조선으로 올라와서부터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을 수 없겠습네다. 단지....”
당신이 오고 나서부터 그 웃음에 여유가 다시 감돌았다.
류환은 해랑이 온 그 첫날 밤. 서로 맞붙이치고 난 후 해랑의 웃음 속에서 그 생과 사가 다르지 않던 5446부대에서 유일하게 여유로운 표정을 지을 줄 알던 그 자신이 위안을 얻던 것이 사라져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어쩐 일인지 그 다시 어떤 면에서는 거만하기 짝이 없던... 그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건 아마도 당신 때문이겠죠, 총교관 동지.
“리해진이는... 아직 어립네다. 네, 어립네다.”
“그렇군.”
아직까지 태원은 마른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고, 류환은 애기를 향해 초점 잡히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우!”
“...?!?!??!!!!!”
그런 류환의 손을 덥석! 아기가 날듯이 배밀이를 하듯 태원의 무릎에서 힘차게 몸을 밀어 류환의 손가락 하나를 텁!하고 잡았다. 그에 소름이라도 돋은 듯 뒤통수라도 맞은 듯 놀라 굳은 류환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있다.
“...에라이, 띨한 놈.”
류환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목소리가 참으로 한신함을 담고 떨어진다. 그러나 뻣뻣해진 몸은 풀릴 줄은 모른다. 태원이 그런 류환에게 애기를 안아 품에 안겼다. 뻑뻑히 굳어있는 그 탄탄한 몸에 애기가 재미있다는 듯이 한손에는 류환의 손가락을 쥐고 한 손으로는 그 몸을 탁탁- 때린다. 애기한테도 호구로 보이냐, 이 호구야. 태원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듯 했다.
“리해랑이는....”
한숨을 쉬고 다시 바라본 마른하늘이 참으로 맑다.
“감에 의지하는 경향이 많아서 의외로 망설이는 경향이 있지. 개는 뇌가 도련님이잖아.”
그 한숨 같은 말에 풉-하고 류환은 동의해버리고 말았다. 자기 부원들을 통째로 동생삼고 막 부려먹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 녀석은 천생 도련님이다.
‘그런 주제에 정에 굶주린 녀석이지.’
태원은 푸른 그 눈 아픈 하늘에 눈을 감았다.
“리해진이는....”
이제는 자신의 품에서 자리를 잡고 스스로의 발을 잡고 장난치는 애기의 모습에 류환은 몸을 굳히면서도 태원에게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저에게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어리지. 그래, 내 말대로 어려. ...망할 사춘기인 것도 같고.”
“...아-”
류환의 머릿속에 갑자기 해랑과 경합을 버려 죽을 뻔 했다는 그 상처가 떠올랐다. 아.... 자신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애기가 그 얼굴이 재미난지 류환의 얼굴을 보며 꺄르륵- 웃는다.
“널 따라 내려온거다.”
그 말에 류환은 자신의 얼굴을 애기에게 잡히지 않은 한손으로 가리고 말았다. 왠지 겁잡을 수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의 머리..가 아니라 어깨를 토닥이는 태원의 손이 느껴진다.
“니가 그나마 가장 정상이니까....”
“......”]
류환은 그 뒷말을 기억한다.
‘그 놈들 좀 챙겨라.’
그 말이 귀에서 웅웅거리는 느낌이었다. 류환은 잠시 그가 보았을 하늘을 보았다. 맑다. 무척이나 맑은 하늘이었다. 당신도 이런 하늘을 보았습네까? 류환의 눈이 흐릿해졌다.
“기래. 그래도 여서 올라가는게 어디네?”
다시 해진의 머리를 쓰다듬은 류환이 어느 새 실실 웃는 리해랑을 바라보았다. 왜 그리 굳은 얼굴을 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자신은 제 눈을 피했을 거라 생각하겠지. 류환은 옆으로 트인 시야로, 흐릿한 초점 사이로 보았던 그 처음 보는 굳은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의 해랑의 웃음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 당장이라도 죽음이 닥쳐온다 해도 마치 그것이 산해진미인 마냥 여유로움이 지금 보이지 않는다. 5446부대 시절 자신조차 무섭다 느낄 때 위안을 얻던 그 여유로움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앞날이 보이지 않는 여느 남조선의 우울한 청년과도 같아 보였다.
“리해진이...”
“..네?”
류환이 방그레 웃으며 해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다. 해진이 움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얼굴을 붉힌다.
“잡으라우.”
“?”
리해진은 이내 류환의 눈짓 끝에 있는 ?를 띄우는 해랑을 발견했다. 해진은 후-하는 숨소리를 뱉고는.... 가차없이 해랑의 무릎을 잡아끌었다.
“끄악! 너.. 너 뭐하네!!”
“어허- 리해랑이. 가만이 있으라우.”
류환의 주머니에서 천천히 작은 플라스틱 병과 천을 꺼내들었다.
“뭐..뭐네? 뭐네?!??”
당황해 공황상태가 된 리해랑의 두 손을 잡아 빼 다리 사이에 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류환이 천천히 주머니에서 꺼낸 천위에 플라스틱 안의 내용물을 묻혔다.
그리고...
“억! 뭐하네?!?? 내래가 그기 바르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네?!??”
“..잘 하셨습니다, 류환 형. 박박 닦아버리십시오.”
“~♪”
“악! 앙돼!!”
콧노래까지 부르는 류환의 손에 검게 칠해졌던 해랑의 매니큐어가 사라져나간다. 해진이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그 모습을 바라본다. 해랑의 얼굴이 그 검게 칠하기 위해 고생했던 생고생이 지나간다. 아..앙돼- 해랑의 눈에 손가락 하나하나 확실하게 매니큐어를 지워나가는 그 모습이 마치 악귀 같았다.
그 리무버라 불리는 것은 태원이 친히 류환에게 하사하고 간 물건이었다.
===================================
진우는 눈을 깜빡이며 싱글거리고 있었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 바라보는 서해가 참으로... 참혹했다.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퉤-하고 바닥에 뱉어 발로 직직 끌어와 끈 진우는 그 하회탈 같은 얼굴로 천천히 무전기를 입에 대었다.
“뽀글이가 미끼를 물었네, 기래?”
-뽀글이니까요.
즉답으로 오는 말에 다시 한 번 낄낄거린 진우의 눈이 진득한 색으로 빛났다. 저기- 저 곳에서- 자신은 갈갈이 찢겨죽은 것이다. 그렇다. 28세의 ‘최 진우’라는 인물은 이로써 명을 다한 것이다. 그것이 어찌 그리 유쾌한지 진우는 낄낄거리며 바닥을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눈물을 훔쳤다.
“윽- 닝기미...”
-핡- 진우뿡 지금 신음한거?
엄마, 나 이 여자 싫어요. 진우가 눈을 얇게 만들며 무전기를 보았다. 여자의 목소리 이후로 남자들과 여자들의 목소리가 엉켜서 툭툭 나온다. 그러지 말라는 말도 있고, 변태라느니, 언니라느니, 과연 보스라느니... 역시 이 집단은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아. 진우는 자신이 그 집단의 헤드라는 사실을 까먹고 있었다.
11월 21일.
서해가 폭격당한 그 날이다.
“부디-”
하회탈의 얼굴을 한 진우가 그 얼굴 그 낯으로 활활 타오르는 서해를 보던 망원경을 내린다. 한 송이의 국화를 그 방향을 향해 던진 진우의 입가에 말간 웃음이 참으로 잔인하게 맺혀있다. 그러나 그 미소에 일말의 슬픔이 맺혀있다.
방긋 웃는 그 말 뒤에는 무슨 말이 있었을까?
-----------------------------------
평양.
유경호텔.
저 멀리 제련소 굴뚝의 연기까지 한눈에 굽어보이는 이 호텔은 완공되지 못 한 북한의 상징으로 우습게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
그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군홧발과 시멘트가 만난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소리없이 올라서는 이가 있었다.
대좌 김태원
5446남파특수부대
수석교관이자 총교관
이명으로 많은 이름을 둔 그는 안에서도 밖에서도 정말로 그 이름보다 많은 이명으로 불렸다. 북의 변견, 이례 없는 괴물, 인간병기는 꽤나 양호한 편에 속했다. 그의 속칭은 가끔 저급할 정도로 악하기도 하고 때로는 유치찬란할 정도로 허황되기도 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괴물’이 되기에 그가 걸어온 길은 여전히 피투성이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태원은 자신이 눈을 감는 그 날까지 그리 되리라고 생각한다.
착-
군홧발이 어느 정도에서부터는 소리가.. 부러 인기척이 나도록 조절하며 올라와 맑은 하늘이 보이는 유리 없는 창 너머를 보는 대장 동지에게 경례를 한다. 그 말없는 경례에 리무혁 대장이 고개를 들어 노학산 자락을 바라보았다. 태원은 그 옆모습을 시선조차 두지 않고 그림자 속에서 저 너머- 그림자 진 벽만을 바라보았다.
“왔는가, 대좌 동지. 올라오느라 고생했네. 편히 쉬게”
고개 돌리지 않고 말하는 대장 동지의 말에 그저 다시 발을 구르고 손을 내릴 뿐이다. 그 모습이 일견 딱딱한 군인의 판에 박혀있기 그지없다. 여전히 콘크리트 덩어리 너머를 보는 대장 동지와 마찬가지로 태원도 여전히 그림자- 그 너머만을 보고 있었다.
그림자 진 그 아래에서.
“왜 여기로 불렀는지 궁금하겠구만 기래. 조용히 대좌 동무 의견을 듣고 싶었어.”
“......”
말없는 침묵은 마치 말을 할 수 없는 사람 같게 태원을 만들었다. 그의 목이 마치 막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그마한 숨소리만이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이, 존재하고 있다 말하는 것 같이, 심장소리마저 조용히 뛴다.
“내래 이 짓다 만 건물이 참 맘에 들어! 남들이 흉물이다. 세계에서 제일 큰 쓰레기다 말이 많지만 원대한 꿈을 앞두고 묵묵히 때를 기다리는 것이 꼭 우리 공화국과 닮았어.”
지랄하네. 태원의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태원은 그 목소리를 다시 꾹- 내리누른다.
대장이 태원을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 대체로 자신의 임의나 판단 하로 25살 이후로 남한과 북한, 심지어는 외국까지 넘나들었다. 그 전에는 그래... 자신이 아주 파격적인 특례로 계급을 어린 나이에 받았을 적.. 그 때 구경삼듯이 왔던 것 외에는.. 그래, 그 때 외에는 대체로 그저 문서 형식의 명령서만이 내려왔었다. 자신은 그에 대꾸도 아무런 말도 없이 묵묵히 따랐을 뿐-
아니지, 그게 아니잖아? 정말 묵묵히 따랐어? 안에서부터 삐죽이는 말이 경망스럽다.
“동무도 알다시피 이번 문제로 우리의 출혈 없이는 해결하기가 쉽지 않아. 잠시 남조선 아새끼들 비위를 맞춰줄 필요가 있갔어.”
까득- 안에서부터 박아놓은 무언가가 벽을 긁는 듯 소리를 낸다. 비위라고? 그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태원은 그저 사나운 목소리야.하고 생각한다.
“증거가 확실해져버렸으니. 동무, 내 입장이 아주 곤란해. 내가 계획한 일이 이렇게 됐으니. 무슨 말인지 알갔어?”
태원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괴소리가 시끄럽다. 마치, 귀가 아픈 것 같이 윙윙- 안에서부터 울려퍼진다. 태원은 천천히 자신의 입을 열었다.
“내리실 명령이라도 있으십네까.”
매끄럽지만 딱딱하게 들려오는 낮은 음의 목소리는 여전히 묵직하다. 그리고 여전히 무척이나 낮았다.
“몇 가지 협약과 같이 남조선에선 남에 위장해 있는 우리 혁명전사 일부의 정보를 요구하네. 자기들 분위기 좋으니까 그만큼 내놓아라 이거지. 남조선 중심부에 있는 최고 혁명전사 30명의 정보를 요구하네. 싹 다 잡아버리겠다 이거 아니갔어? 그것도 상급전사들 순으로.”
상급전사. 그 말에 스치는 인물들이 무려 10명이 넘는다. 태원은 다시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시선은 자신의 군홧발 앞 코를 바라보고 있다. 태원은 의식적으로 시선을 위로 올린다.
리무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군모를 쓴 다음 마치 지저분한 곳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듯 바지춤을 터는 모습에 안에서부터 비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닮았다며! 근데 왜 터러, 이- 거기까지. 태원은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서 신경을 끄기라도 하듯 다시 군모를 고쳐쓰는 리무혁을 바라보았다. 물론, 내 말에 동의는 한다. 비죽 튀어나오는 본심에 안에서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동무... 내가 만든 5446비밀부대 말이야... 내래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아끼는지 알지?”
그 말에 비죽-하고 튀어나오는 목소리를 막지 못 한다. 자랑스러워해? 아니지, 무서워하고 곤란해 했잖아? 이제는 그 구실 없는 개살구 꼴이니까!! 감기는 눈 아래는 어둠 뿐이다.
“오늘 위원장 동지와 애길 했네. 이제 위원장 동지께서도 5446부대의 존재를 알고 계시네. 남조선에 넘길 30명에 14명이 포함되었네.”
이제가 아니잖아? 웽웽하게 터지는 목소리가 목구멍 안에서 가로막힌다.
“혹 다른 의견 있나?”
실은.. 태원은 이 외에도 다른 대장 동지를 만나고 왔었다. 그네는 위로 올리라 했지. 의견일치가 안 되었구나? 안에서부터 들리는 키득거림에 한숨을 내쉰다. 그네는 그러고나서 분명, 리무혁 대장동지가 자넬 부를거라- 그리 말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이 뭐라 말했더라?
“정보를...”
“음?”
천천히 열리는 그 입에 의외라는 듯 리무혁이 자신을 쳐다본다.
만약 그네들을 올리면 어떻게 될까? 반역자로 죽이거나 버림패가 될 확률이 높다. 이미 넘어간 정보들은 불필요하다. 그렇다면, 리무혁 동지 말대로 그냥 정보를 넘기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긴. 그냥 gg치는거지, 뭐. 태원은 알고 있다. 넘어간 정보들에 회유되는 이가 무척이나 드물다는 것을.
특히, 이런 몰이사냥이나 내세우기용은 더욱.
왜냐면 높은 놈이라도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게 없거든.
“넘기기 전에 그들에게-”
느릿하게 나오는 말에 리무혁이 삐뚜름히 그를 바라본다. 여전히 사갈 같은 눈이다. 굳이 자신을 왜 불렀겠는가. 통보하기 위해서? 하- 대장이?
“죽을 기회를 주시라요.”
“죽을 기회?”
의외의 말이었을까? 눈썹 하나를 치켜 올리는 리무혁의 모습에 태원이 느릿하나 정확하게 차렷 자세로 예를 취하며 입을 연다.
“네. 위대한 공화국을 위해 얼마든지 목숨을 바칠 전사들입니다. 차라리 자결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그 눈은 곧기 그지없었다. 한자 한자 정확히 나오는 말에 리무혁의 눈이 사갈 같이 번들거린다. 뱀, 파충류의 눈 마냥 교활한 그 눈에 태원의 안에서 비식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 보기 힘든 대장이 자신을 불러 따로 말하는 거면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그렇겠지? 빙글거리며 말하는 폼이 꼭 희극 같다.
잠시 고민하는 듯 뒷짐을 지는 모습에 이제는 정말로 귀가 울리듯이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곤란해. 태원은 안에서부터 들리는 그 웃음소리를 내리누르며 머릿속으로 중얼거렸다.
“동무.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갔어? 지금까지와는 달리 전투능력을 최우선으로 해서 길러지고 만들어진 ‘연어’들이야. 만에 하나 그들이 다른 생각을 한다면 얼마나 위험한지는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죽을 기회를 달라고?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느냐 이 말이야!”
‘책임’이라는 그 단어에 부러 힘이 들림에 이제는 바닥까지 긁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태원은 조용히 속으로 한숨을 쉰다.
“5446비밀 남파 특수부대 책임교관 대좌 김태원.”
그의 눈이 닿은 곳에 있는 흰머리의 남성을 보며 태원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명령 불복 시 전원 제 손으로 죽이고 오갔습네다.”
감각 없는 말투다. 마치, 일상의 그것 같은 말투는 더욱 믿음을 준다.
“좋군, 동무가 그리 나온다면 믿갔어. 즉시 진행하라우.”
천천히 경례를 하는 태원이 채 경례를 마치기도 전에 리무혁 대장의 모습이 사라져간다. 내려가는 그 모습을 보며 멀뚱히 올린 손을 내리지 못 한 태원의 입에 대뜸 남조선에서 올라오기 시작할 때부터 들린 적 없던 남조선의 말이 툭- 튀어나온다.
“내숭은.”
거, 리해랑이 참 안 닮아서 다행이네.
성형 잘 했어, 아주.
===================================
수혁은 심기가 불편했다.
“.....”
자신의 손에 들린 서류 봉투가 두 개.
-탁.
“아.. 씨발.”
낮게 나까려지는 욕만큼 심란한 마음에 답답한 와이셔츠의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목까지 채운 단추를 뜯어낼 듯이 두어 개 풀어헤친다.
처음 받았던 봉투 안에는 ‘서 상구’라는 인물에 대한 기록과 현재 위치가 수록된 문서가 나열되었다. 그 외에도 대한민국의 윗줄의 비리라 할 수 있는 첩으로, 본처로 들어가 있는 몇 여자들에 대한 정보, 몇몇 고위 인사직에 종사하는 불순분자들의 명단까지-
“아...”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다.
아직까지 자신이 상부에 올린 서류는 ‘서 상구’. 오로지 그 대학 교수라는 이의 서류뿐이었다. 서류 출처 또한 그저 ‘불순분자로 추정되는 감시자에 대한 감시’에 대한 임무를 맞았다. 그리 둘러대었다. 지령이 없이 그 날 만났던 김태원 대좌가 도움이 되었다.
그로 인해 아무런 터치 없이 상부 또한 그리 믿었으니까.
“.........”
수혁의 눈이 두 개의 서류 중 또 다른 서류에게 시선이 간다.
“..........”
기묘한 긴장감. 알 수 없는 답답함. 속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혼란스러움. 미식거리는 거북함. 그리고-
이 알 수 없는 두근거리는 기대감.
“.........”
풀린 봉인 안에서 다시 나오는 하얀 서류와 두어 장의 사진.
아버지.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하아-”
아비에 대한 그 기록과 꼼꼼한 관찰, 그 주변인물에 대한 파악에 그 집요할 정도로 깨끗한 그의 실적을 알 것 같았다. 국정원에 들어가서도 자세히 알지 못 했던 아비가 이곳에 있다. 그의 사소했던 일상과 목숨을 바쳤던 일, 그가 사랑했던 가족이 그 안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난 이런 거 몰라.
얼굴을 부비는 수혁 안에서 아직 어렸을 적의 서수혁이 그리 왜치는 것 같았다.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야-하고 수혁은 생각했다. 자신도 몰랐던 곪았던 상처가 터진 것 같다. 눈을 감았다.
그 위에 느껴지는 허상의 온기.
다시 그 위에 자신의 팔등을 올린다. 쇼파 뒤로 기댄 목이 뻑뻑하다.
당신은, 총교관 당신은, 김태원 대좌 당신은.
‘나에게 뭘 바라는 겁니까.’
아비에 대한 서류 아래로 같은 봉투 안에 있던 또 다른 이에 대한 서류가 있다. 차마 아비의 서류와는 달리 다시 보기조차 겁이 나는 서류다.
그 겁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는 몰라도.
-----------------------------------
해랑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래 우야라는 깁네까, 대좌 동지.”
그의 손에 들린 서류는 생각보다 두툼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이 뭔지 자신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그게 무섭다.
몇 번이고 다시 보고 다시 봤던 서류의 내용이 구역질이 난다. 자신도 몰랐던 그 속사정들이 속속들이 써져있는 모습은 시궁창의 역한 냄새보다 더러웠고, 지금까지 자신의 손에 묻혔던 피보다도 질척했으며, 그 어디의 전쟁터의 처참함보다도 비참했다.
잠약(수면제)이라도 마신 듯 뻐근해지는 기분에 해랑은 기타 케이스에 몸을 기댔다.
“아.... 몰라, 합격이나 해라.”
내던져버린 서류 더미에 대여섯 명의 사진이 각 서류마다 클립으로 끼여 있다. 그 얼굴을 애써 외면한다. 해랑의 시선은 이제 노랑노랑하게 물들인(범인은 이 옆옆방에 있지. 내 몸에 토악질한 그녀지.) 손톱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고조, 거- 독~~~한 리해진이. 매니큐어까지 스틸해 가네?
해랑의 입술이 어두운 낯과는 달리 삐죽거렸다.
-----------------------------------
원류환, 그는 석이 슈퍼에서 조심스레 눈을 깜빡였다.
대좌 김 태원, 5446부대 수석교관이자 총교관 동지. 아마도 인민공화국 역사상 가장 빠른 진급과 실적을 지닌 최연소라는 나이에 대좌라는 직위까지 올라간 남자. 그리고....
“으음-”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류환에게 있어 태원은 꽤 상관-이라는 느낌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체로 명령을 내리는 입장이었고, 자신은 그의 명령으로 훈련을 하는 것이 대부분의 일상이었으니까.
“.......”
평상에 앉아 머리를 긁적거린 류환은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심정으로 자신에게 챙기라 말한 걸까? 조금 복잡한 심경. 눈을 감으면 아직 선하다. 처음 그 집에서 저녁을 먹었을 때, 그 이후 순임이 지나가는 그를 붙잡아 자신을 목욕시키라 할 때, 해랑에게 바지가랑이 붙잡혀 난감하다는 얼굴로 그 징징거림을 평상에서 받아주고 있던 모습, 가끔 자신의 머리를 때리는 윤유준이나 치웅이, 성민이를 막아주던 행동,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잘 했다-그리 말하던 눈, 말은 없으나 조용한 가운데 공존하던 평화.
남조선에 내려와 있던 평화에 그, 김태원 교관 동지는 조용히 스며들어 왔다.
“내래.....”
잠깐 나온 입에서는 더 이상의 말을 잊지 못 한다. 자신의 머리를 헝크려봤자 지금의 기분은 뭐라 표현해야할지 정의할 수가 없다. 자신은 이런 것 배워본 적 없다. 안 적이 없다. 격어본 적이....
“아.”
[그 날은 여느 때와 같았다. 단지, 오랜만의 휴식으로 다른 조원들까지 어울려 공놀이를 했었더랬다. 그리고 그 곳에서 무엇 때문이었는지 몸싸움이 벌어졌더랬다.
“뭐하는 짓이네!!”
“하? 내래가 뭘 했다 기러네?”
이죽거리는 백두조 황재오와 짜증스러운 해랑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끵-거리는 소리를 내며 옆에서 최완우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있었다.
자신이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싸우고 있었던 터라 어떻게 상황조차 모른 채 류환은 그 어떻게 제대로 겨루지도 못 한 채 자신들을 헐뜯고 겨우 나눠져 으르렁거리는 그네들에게 다가갔다. 그런 자신의 옆에서 누구였더라- 아마 풍산조장이었던 이였던 것 같다.
그가 한숨을 쉬며 ‘저.. 저- 저러다 총교관 동지오믄 꼬랑지 말 선스나들이... 에잉-’ 늙으니 같은 말투에 한숨에 어쩐지 웃음이 났다. 아, 맞는 말이야. 지척까지 다가온 그네들이 제대로 겨루지 못 하는 최대의 이유에는 언제나 ‘총교관 동지’가 있었다.
“기래, 뭔 일이네?”
“아- 들어보라우, 원 소좌 동지!!!”
억울하다는 듯이 자신에게 팩!하고 고개를 돌리며 꽥-하고 소리치는 해랑에 설핏 얼굴을 찌푸리면서 눈을 깜빡였다. 그런 자신을 힐끔 본 황재오가 입술을 짓이기는게 보였다. 그 모습에 얼추 일의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황재오가 또 해랑을 도발했나. 그런 생각에 류환은 이내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언제나 웃고 있는 저 면상이 더 함박만하게 웃음이 지어지게 하는 사람을 안다. 아마도- 그 약점아닌 약점.
“아- 기러고보니 고조 뒷동산에 총교관 동지가 주무시든데.....”
정말로 문득 떠올라 지나가는 말처럼 내뱉은 말에 해랑이 쏜살같이 사라진다. '기냥 내래가 진기로 해두라!!!‘하며 손까지 흔드는 모양새에 그 뒤로 최완우가 어어-하는 소리를 내며 머뭇머뭇 따라나서는 모습이 보인다. 옆에 있는 황재오가 황망한 시선으로 자신을 보더니 입을 연다.
“원류환 동무.....”
“.....고조, 전에 조련사했네?”
자신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풍산조장에 하-하는 숨을 뱉었다. 아마 이번 기수가 좀 특이한 것 같다. 보통이면 황재오와 리해랑 같이 서로 물고 뜯으며 으르렁거렸을 조장들이 이리 지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어깨에 툭툭- 두드린 풍산조장이 입을 연다.
“긴데, 그 아네?”
“...?”
이제는 투덜거리며 남은 조원들을 부려 뒷정리를 하는 황재오를 보던 류환은 천천히 풍산조장을 보았다. 풍산조장은 그런 류환을 보지도 않은 채 정면의 어딘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총교관 동지. 건물 옥상에서 여 보고 있었다는거.”
“...?!???!!”
화들짝 놀라 숙소 건물의 위를 올려다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보이는 검은 인영이 흐릿하게 보였다 사라진다. 아-하고 입이 떡-하고 벌어진다. 그런 자신의 어깨에 다시 툭툭- 두드려준 풍산조장이 힘내-라는 말을 하고는 멀어진다.
나.. 일친기네?
-----------------------------------
“.......”
“..........”
뻑뻑하게 몸을 움직이지도 못 한 채 기립자세로 있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의 그 조용한 기세는 평범한 인민에 가까웠지만 그 속은 그 누구보다도 무섭다는 것을 잘 안다. 류환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상기하며 몸을 움츠렸다.
“기래, 원류환이.”
차렷자세가 이렇게 힘든 적은 처음이다.
“넷!”
“........”
자신을 빤- 바라본 태원이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아- 하고 속에서부터 앞으로 있을 일을 걱정한다. 아마... 리해진이의 일이 있은 지 며칠도 안 되었던 것 같다. 그 올라간 손이 이제는 자신을 처단할까- 그리 두려워 했었던 것도 같다.
툭-하고 자신의 짧은 머리 위에 떨어지기는 전에는.
“?!??”
“잘했다.”
그..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느낌.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은 그 잠깐의 긴장감과 안온함. 조금 후 알 수 없는 뿌듯함.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이기 뭐네. 꼭 어린 선스나도 아니고....’
그리고 가던 길을 가는 대좌도 모르고 한참을 그리 굳어있었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그가 자신의 머리를 토닥? 쓰다듬는다? 여하튼 그런 적이 몇 번 있었다. 단지, 자신은 긴장에 그 감각에 익숙지 못 했고, 금방 오마니의 생각에 덧칠되어 아득하게 잊어먹었을 뿐.
“아...아아아아─”
몸을 팍- 숙여 머리를 헝크러트렸다.
마치, 그 어린 시절의 그 때 마냥 얼굴이 붉어진다.
‘이건.. 그러니까.... 그 것과 비슷한기네?’
문득, 든 류환의 눈에 이발소 박씨가 치웅이와 성민이의 손을 잡고 내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는 류환의 눈이 천천히 따스히 풀려간다.
“....아아-”
감은 눈 위로 태양이 따스히 내려쬔다.
===================================
해랑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 이런 닝기미....
“아오! 왜 우리가 이런 것 까지 해야 하는데!!”
짜증을 내는 해랑의 손이 들려있는 손질된 멸치를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머리를 박박 긁는 그를 보며 해진이 한심하단 얼굴을 해보인다. 자신 앞에 묵묵히 하시는 류환 조장님의 반만이라도 닮으십쇼-하는 눈이었다. 해랑은 이를 북북- 갈았다. 아, 내래 뭣 때문에 요새 잠도 못 자고 고민하는지 알기나 하네?!?? 그러나 이미 다잡아지는 마음에 한숨이 터져 나온다.
물론,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지만.
해진은 그런 해랑을 잠깐 바라보다 하늘을 보았다. 문득 위에 올라가 계실 대좌가 떠올랐다. 그 묘한 불안감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
파란 하늘.
분명, 같은 하늘.
“조장...”
“응?”
그 하늘을 보다 떠오른, 정말 문뜩 떠오른 생각이었다.
“조장은... 다음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으세요?”
“아새끼... 별....”
“거- 느그는 호칭이나 통일하라우.”
이제는 평상에 모로 누워 멸치를 손질하는 해랑의 말에 류환과 해진이 눈을 껌뻑였다. 여직 해진이 매니큐어를 뺏어간게 뚱한지 부루퉁한 얼굴의 해랑이 꿍하니 말했다.
“아- 거, 형이었다가 조장이었다가- 고조 하나로 통일하라우.”
심드렁하니 말하는 그 말에 해진의 얼굴이 발그랗게 물든다. 흘끗- 류환을 본 해진이 자신의 손에 있는 멸치를 만지작거린다. 그 꼴에 해랑이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트리고는 류환을 본다. 그에 류환도 해랑을 본다. 야. 저거 어쩔거, 저거. 동지가 일 쳤으니 동지가 정리하라우. 에헤이- 원소좌 동무- 거 그러지 말고- 류환이 어쩐지 옛적 일이라도 떠오르는지 눈살을 찌푸린다.
“거.... 내키는데로 부르믄 되는기제 뭘 그러네?”
찜찜함을 내리누르며 그리 말하는 그는 요 근래에 인내심이 격하게 키워지는 것 같았다. 에효- 한숨을 차마 내뱉지 못했다. 해진의 얼굴이 근래에 드물게 밝아진다.
해랑의 얼굴이 더 이상해졌다.
“그...그럼, 형으로-”
“...거, 리해진이는 다음 생에 원류환이 동생으로 태어나라우.”
“그... 어...”
거 터지겠구만, 기래. 류환이 허허로이 웃으며 어디서부터 태클을 걸어야할까-하고 생각했다. 발갛게 물든 얼굴이 정말이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면서 흘끔-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에
‘널 따라 내려온거다.’ 그리 말한 대좌의 음성이 떠오른다.
“뭐.. 그런 선택이 가능하다면....”
다음 생에-라는 선택이 가능하다면.... 류환은 천천히 자신의 손에 손질되는 멸치를 내려 보며 설핏.... 눈앞에 아스라이 환상처럼 보이는 순임과 두석, 그리고 이제는 일상이 된 이들과 함께 그... 일상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 했던 총교관 동지의 모습이 보인다.
“평범했음 좋겠지.”
그 평범에 그네들이 있는... 그런 거.
“평범하게요?”
해진이 눈을 똥그라니 뜨며 류환을 보았다. 해랑은 어쩐지 굳은 낯으로 류환을 보았다. 저 평온한 얼굴... 그 얼굴이 있기 위해서는.... 한숨같은 신음이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평범한 나라에, 평범한 집에, 평범한 아이로 태어나서 계속 평범하게 살다 죽는..... 그런 거”
“조장, 꿈이 크시군요!”
해랑은 이 때 문득 태원이 옛적에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에 피식- 웃으며 눈 똥그라니 뜨는 해진을 보았다. 어쩐지 즐거운 얼굴.
“뭐, 임마!... 그럼 넌 뭘로 태어날래!”
얼굴 붉히지 마. 해랑과 류환이 동시에 그런 생각을 했다.
“전... 전 그냥.... 평범하게 태어난 조장의 옆집에 태어날 겁니다.”
동생은.. 너무 과분하기에, 재 주제를 알기에.... 발간 해진의 얼굴을 보며 얼씨구- 모로 누워있던 해랑의 추임새였다. 해랑은 그런 그네들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한 것들-”
해랑의 말에 류환과 해진의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에라이.... 내 조원이 내려왔어야 했어!! 속으로 꿍얼거리며 2:1이라느니, 대좌 동지가 그립다느니 중얼거린 해랑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거, 고조.. 그리 연약해서 그라서 쓰갔어?”
“그럼, 해랑 형은 뭔데 그러십니까?”
까칠하긴. 해랑은 콧방귀를 뀌며 천천히 몸을 바로 새웠다. 그러면서 마치 비웃는 것 같은 표정, 그래- 그 특유의 오만함을 머금은 얼굴로 비죽 입을 열었다.
“내래는 총교관 동지 딸로 태어날 기야.”
“......?!?!???”
입을 쩍- 벌리는 오성조 조장들을 보며 훗-하고 해랑이 비웃는다.
“평~범하게 사는 총교관 동지의 평~범한 쭉쭉-빵빵한 초!미녀로 태어나 네놈들 갖고 놀다 버려주마. 큭큭큭!”
킬킬거리는 해랑에 쩍 굳어있던 아직 어린 회복력 좋은 해진이 번뜩- 얼굴을 치켜들며 외친다.
“아...안 됩니다!”
“엥?”
“제가 총교관 동지 아로 태어날 겁니다!”
“...뭣!!!”
버럭! 선언하듯 말하는 그 말에 해랑이 눈을 치뜨며 어서 조장한테 덤비냐, 저도 조장이다 거리며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쩌적- 굳어있던 류환이 천천히 해동되기 시작했다.
“......”
“...에?”
류환이 조용히 해진의 양 팔뚝을 잡아 뒤로 꺽어 결박한다. 그에 놀라 눈 동그라니 뜨는 해진을 무시하고 류환의 눈이 해랑과 마주친다. 마찬가지로 멈칫- 굳어있던 해랑이 이내...
“훗-”
“으...앗! 뭐..뭡네!! 으- 하하하하하! 아하, 윽! 하지 마하하하하-!!!”
해진의 옆구리를 수시 공략해 나갔다. 기래, 이번만은 동맹인기야. 해랑의 눈에 류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윽-거리며 발로 어떻게 해랑을 막으려는 해진을 보며 류환이 환해진 낯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기런데, 왜 저래 어두운 아우라가 보이네?’
해랑은 움찔- 보이는 류환의 몸에서 나오는 살기와는 다른 것에 열심히 해진의 옆구리를 공략했다.
-----------------------------------
“...헉...허억.......”
“해랑. 손질할 멸치 은근슬쩍 넘기지 마라.”
“...예리한 놈, 그러지 말고 좀 더 맡아!”
탈진한 듯 평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해진을 버리고 해랑이 류환과 투닥거린다.
그 모습에 묘한 배신감을 느끼며 옆구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해진은 투닥거리는 그네들 가운데로 가 다시 멸치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턱턱 멸치 때문에 겨루기까지한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는 공평하게 삼등분한 것이니 서로 미루거나 불만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악!! 진짜 내가 멸치 똥이나 따려고 여기 온 거냐!”
평상 위에서 몸부림치는 해랑을 보며 류환이 혀를 찼다.
“야, 야! 그러면서 이쪽으로 넘기지 마!”
“왜 이런 것까지 시키는 거냐!”
투덜거리는 해랑에 류환이 떨어진 멸치 두어개 자신의 바구니에 담으며 답했다.
“그러게 나 혼자 한다니까 왜 돕는다고 나서.”
“제 생각엔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뭔 꿍꿍이. 류환이 멸치를 손질하며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 조장께서 멸치에 버릴 게 있다고 보십니까? 내장 부분을 분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대가리까지 떼어내라 시킨 것으로 보아 늙은 에미나이는 분명 다른 속셈인 있습니다. ‘우린 서민이지만 멸치는 몸통만 먹는다’는 허세를 부림과 동시에 우리 반응을 보기 위해서죠”
그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해진의 분석에 류환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여기선 다 그렇게 먹어.... 그와는 다르게 해랑이 수긍하는 것 같다.
류환은 하아-하고 앞날이 걱정되었다.
“또 멸치처럼 작은 어종을 손질시켜서 우리가 몰래 몇 마리 먹는지 시험해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처음부터 219마리라는 것을 파악해뒀으니 우린 이 수량을 정확하게 에미나이에게 넘김으로써 빈틈을 보여선 안 됩니다.”
할 말 없다. 류환은 어쩐지 눈을 가리고 싶어졌다.
“오, 역시 분석능력 뛰어나군. 괜히 온 게 아니었어.”
니가 제일 정상적이라던 대좌의 말이 왕왕 울렸다.
“그 뛰어난 정보 분석 능력으로 한번 말해봐. 우리가 언제까지 임무 대기 상태로 있어야 하는지.”
그 말에 해진이 눈을 깜빡였다.
“제가 오기 저에도 정확한 정보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 외에도 총교관 동지가 내려왔었으니 딱히 저희까지 움직일 일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현 상황은 지난 해상교전의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총교관 동지도 그것 때문에 올라가신 것 같고요. 북남 모두 사상자가 나온 만큼 그냥 지나가긴 힘들 테니까 말입니다.”
“뭐? 교전? 무슨 말이야?”
류환이 교전이란 말에 적잖이 놀라자 해랑은 눈을 꿈뻑였다. 아.. 어쩐지, 원류환이가 조용하더라니. 해랑은 불안하게 떨려오는 가슴을 내리누른다.
“지난달 21일 17시 07분 서해에서 교전이 있었습니다. 공화국은 7명, 남조선은 4명이 전사했죠.”
“전혀... 몰랐어.. 나로선 언론 정보를 접할 수 없는 설정이라. 그런데 어째서 이런 거지? 그렇다면 우리가 더 바빠져야 정상 아닌가? 언제부터 우리 공화국이 이렇게 소극적이 된 거지?”
해랑은 탁-하고 자신의 이마를 쳤다.
“그게, 교전은 공화국의 일방적 선제공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가 먼저 공격한 것이 밝혀져서 국제사회에서 처지가 곤란해진 거죠.”
셋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해랑은 눈을 잠시 감았다. 근시일에.. 아니- 해랑의 머릿속에 둥둥 떠오른 서류를 넘어 툭-하고 대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매도 먼저 맞아야-’
‘현실은 직시해야-’
‘늦었다 했을 때가-’
“......”
엉켜드는 목소리들과 각종 책들의 이야기.
해랑은 저도 모르게 툭-하고 말해 버렸다.
“내래... 오늘 보여줄 것이 있어야.”
“?”
“.....”
류환의 의문 섞인 눈과 해진의 어두워진 눈이 해랑을 향한다.
해랑은 그 눈을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거- ‘집’에서 보자고.”
===================================
같은 시각, 틀린 장소.
손에 쥐여진 각각의 핸드폰과 호출기.
흩어진 영문과 기호가 뒤엉켜 날라 온 메시지.
‘자살’
진우는 새하얗게 웃었다.
“어쭈구리?”
-----------------------------------
“하-”
수혁은 머리가 뒤엉켰다. 자신에게 온 이 자살명령. 24시간 안에- 24시간 안? 헝클어지는 머리만큼 머릿속도 헝클어진다.
천천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의 말.
‘-간나들 좀 부탁한다.’
머리를 박박 긁었다.
손가락 끝에서 피가 묻어날 때까지.
무슨 생각이야, 당신!
-----------------------------------
“.......”
해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 뭘 어떻게 하라고? 손에 들린 핸드폰이 덜덜 떨려온다. 시야가 깜빡거린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질되어 간다.
[24시간 이내, 위대한 인민공화국을 위해 5446부대 혁명전사 전원 자결하라.
명령 불복 시 해당 구역 감시자는 책임지고 전원 사살, 보고 후 자결하라.]
눈앞이 아찔하다. 질끈 눈을 감았다.
“총교관... 총교관 동지, 대좌...대좌님.”
꾹- 핸드폰을 쥔 손이 하얗게 질려간다. 마치, 구명줄 같은 무언가를 쥐고 있는 것 같이 손을 피지 못 한다.
“집... 집에... 집에 돌아가자.”
하얗게 질린 얼굴이 애처롭다.
해진의 머릿속에 원류환과 리해랑의 얼굴이 둥둥 떠오른다. 그 위에 이미 계속 생각하던 김태원의 얼굴이 흐릿하다. 뭘까- 이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긴박함. 왜... 그 얼굴과 겹쳐 떠오르는 겝니까....
돌아가는 그 길이 이리 대좌동지가 사라지고 나서부터 해진에게는 그리 숨 막힐 수 없었다.
-----------------------------------
“리해랑이....”
불안감... 그래, 불안감에 묘하게 일그러진 류환의 얼굴을 보며 해랑은 비싯- 웃었다.
“내래- 거 이럴 줄 알았지!”
낄낄거리는 그 웃음소리에 류환은 어렴풋이 대좌 동지가 떠나고 나서 없어졌던 여유를 볼 수 있었다. 그 여유로움에 류환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의아함을 느꼈다.
“그기 아네?”
싱글거리는 해랑에 류환은 천천히 그가 앉은 자리 맞은편에 앉았다.
“내래 오마니는 겹마누라(첩)야.”
“.....”
묘하게 가벼운 목소리에 묵직한 무게가 실려 들려온다. 류환은 눕다시피 앉은뱅이 의자에 기대어 앉은 해랑을 보았다. 그의 앞에 놓인 앉은뱅이책상 위에 두툼한 서류 봉투가 있다. 눈에 띄는 그것에 시선을 두었던 류환은 이내 다시 말을 하는 해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거- 우리 오마니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았는디..... 날 낳고 곧 바로 쫒겨났어야.”
평온함마저 가장된 목소리에 얼핏 분노가 섞여 들어가 있다.
“거- 알잖네? 겹마누라 취급 어떤 거... 고조.... 쓰레기 더미에서... 죽었어.”
한숨 쉬듯이 말하는 그 말에 류환의 눈이 흐릿해져갔다. 왜... 지금 그 말을 하는거냐, 리해랑이. 천천히 마주쳐오는 눈이 아득하다. 해랑은 천천히 서류봉투에서 천천히 서류 하나를 꺼내 류환에게 밀었다.
“아네? 괴물에게 필요한 건... 그 무엇도 아닌 완전무결이야.”
천천히... 왠지, 떨려오는 손으로 류환은 서류를 끌어당겼다. 해랑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는 것 같다. 꼭 멀리서 들리는 것 같이....
“계백 장군이 큰 전쟁에 나서며 처자식 베고 나갔다지? 겨우 만든 인간병기 가족 때문에 들어왔는데 거 가족 때문에 무너지면 어떻갔어? 간접적인 접촉도 할 수 없게 차출된 부대원의 가족은 전부 수용소에 수감돼. 십 몇 년이 지난 지금... 살아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바들거리는 손 안에 있는 것은 서류.
누군가들의 생사와 어딘가의 수용소에 대한 정보와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한 그런 기록.
“아.....”
팔락- 손 안에 있던 서류들이 아래로 흩어진다.
[원 류환.
24세. 5446부대 오성조 제3대 조장.
가족관계로 어머니 한 분만이 있음. 아버지는 군으로 복무 중 임무 파견 중 사망.
5446부대 들어간 후 며칠 후 어머니 또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수용소에 감. 5년하고 8개월 후 복합 피부병 및 구타,]
서류 위 가장 짧게 자신의 신상명세가 적혀있는 그곳에서 눈이 때지지 않는다. 뭐? 이기 뭐네? 내래 뭘 보고 있는기네? 아하하- 내 눈이 잘 못 된기야. 그렇지? 해랑... 리해랑이? 천천히 드는 고개에 언제 온 것인지 리해진이 어두운 얼굴로 서 있다.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린다. 시야가 흐릿하다. 뭐네? 이기...... 뭐네?
차마 읽지 못 했던 마지막 사망의 원인을 눈으로 쫒는다.
[5년하고 8개월 후 복합 피부병 및 구타, 4번의 사산과 잦은 강간으로 사망.]
“...이기 뭐네.”
“그래도 우린 운이 좋은기야....”
“이기 뭐네....”
“적어도 정보라도 알 수 있었으니까.”
“이게 뭐냐고!!!”
격한 짐승의 울부짖음에도 해랑은 여전히 환한 형광등을 올려다보았다.
서류... 안에는 자신에 대한 것도 있었다. 당신은 무슨 생각일까? 무슨 생각으로....
[리 해랑.
24세. 5446부대 흑룡조 제3대 조장.
가족관계로 리 무혁 대장이 아버지로 있음.
어머니는 출산 직후 쫓겨났으며 산후 조리에 실패, 산후풍을 겪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 사망 후 시신 인근 인민들이 수습하지 못해 확인 불가.]
어느새 해랑의 멱살이 류환에게 잡혀있어 목이 아파온다. 감은 눈이 뜨거웠다. 자신한테 소리치는 원류환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제대로 인식이 되지 않는다. 오마니.... 한숨 같은 신음 같은 그 부름에 류환이 해랑의 멱살을 놓아버리고는 머리를 움켜잡고 고함을 지른다. 그 비명성에 감은 눈을 뜨지 않고 해랑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하하하- 울음대신 나오는 웃음이 애처롭다. 제대로 보지도 못 했던 녀성의 사진이 서류 안에 끼어있다.
그 사진이... 그리 애틋할 수 없다.
“........”
해진은 천천히 자신에게 건내진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이 서류에는 뭐가 써있을까? 자신 앞에 오열하는 류환과 허탈한 웃음을 짓는 해랑이 마치 학교에서 본 스크린의 그것 같다. 해진은 어깨 아래로 떨어지는 가방을 느끼지 못 한다.
“.......으-”
떨려오는 손을 무시하고 내려다 본 서류가 덜덜 떨린다.
[리 해진.
18세. 5446부대 오성조 제4대 조장.
가족관계로 어머니와 동생 둘이 있음. 아버지는 광산에서 떨어지는 낙석에 사망.
5446부대 들어간 후 며칠 후 어머니 및 동생 둘 또한 이들과 마찬가지로 수용소에 감. 어머니는 4년하고 7개월 후 복합 피부병 및 구타, 지속적 강간, 사산, 자식들을 탈출시킨 시도로 남동생과 같이 총살당함. 여동생 리 해연(15) 탈북시도 생사 확인, 위치 확인 불가.]
“아...”
해진의 눈 위로 구슬 같은 맑은 눈물이 떨어졌다. 해연... 해연이.. 해연이... 중얼거리는 마치 구명줄 같다. 서류 위에 껴져있는 사진을 구명줄마냥 쥐었다. 좀 더.. 좀 더 자세히... 그 아래, 시도한 날짜와 추정된 방법 등이 적힌 서류를 쳐다본다. 바들거리는 손 때문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아 해진은 그 자리에 앉아 한 손으로 다른 한 손을 잡았다.
그러나 계속 떨리는 시계.
그제야 해진은 깨달았다.
온 몸이 떨리고 있었던 거야. 나... 지금 안심한 건가? 해진의 눈에 여전히 오열하는 류환과 이제는 얼굴을 가리는 해랑이 보였다. 투둑-하고 떨어지는 눈물이 아리다.
“이야- 초상났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돌리는 그곳에.
하회탈의 서해교전 때 죽었다던 최진우와 서수혁이 있었다.
===================================
꿍깃- 꿍깃- 자리를 잡고 앉은 진우가 눈 벌게진 3명의 간첩을 보며 천천히...
“...뭐하는 기네?”
“응. 사진찍어.”
“....기니까, 왜?”
“재미있으니까.”
“......하아...”
벽에 기대어있던 서수혁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숨이었다. 해랑은 짜게 식은 눈으로 류환의 눈두덩 위에 올려진 얼음주머니를 냅다 진우를 향해 투척했다.
그러나 이미 찰칵-하고 찍힌 사진.
해랑이 이를 벅벅 갈았다.
“아- 거. 뭐하러 왔네?”
“....죽은 거 아니였습네까?”
“에?”
해랑의 짜증어린 말과 해진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진우가 얼굴을 문지르다 히죽- 웃어보인다.
“아- 그거? 당연히 짝퉁이야. 내래가 미칬다고 쉽게 죽갔어?”
“......”
해진의 의심어린 눈과 해랑의 영문어린 얼굴, 수혁의 심기가 불편한 눈이 진우에게 향했다. 히죽거리던 진우는 이내 맥없이 앉은뱅이 의자 위에 늘어져있는 류환에게 다가갔다. 거- 고조, 맥아리가 없구만 기래? 툭툭- 발로 류환을 건드리는 진우에 해진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저거 뭐하는 거네? 해랑이 튀어나가려는 해진을 제지하며 얇게 뜬 눈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선스나. 도무지 남조선 사람인지 북조선 인민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모습이 기묘하기 짝이 없다.
류환 앞에 진우가 무릎을 쭈그리고 앉는다.
“야-”
“......”
“야-”
“.......”
“.....”
싱긋- 웃는 얼굴에서 수혁은 움칫- 살벌함을 느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어쩌면 이중 가장 진우에 대해 파악했을지 모를 해랑이 그런 진우를 주시했다.
짝-
“야-”
“그... 뭐하는 기네!”
버럭 소리를 치며 튀어나가려는 해진을 해랑이 잡아 제지하며 그 하는 꼴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여전히 하회탈 같은 어쩌면 자애로워도 보이고 친절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 다시금 손을 치켜들었다.
짝- 짝- 짝-
그 매서운 살 맞붇이치는 소리에 멀뚱히 서 있던 수혁마저 질린 표정이 되어갔다. 신음조차 없이 이리저리 맞는 류환을 잠시 손을 내리고 빤- 보던 진우가 얼굴을 삐뚜름히 만들며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탈탈 털었다.
“아- 거, 망할 5446. 존나 내 손만 아프네.”
짜증스레 말하는 그 모습이 본모습. 그렇게 해랑이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우가 5446이라는 단어에 움찔-거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류환의 시선에 싱긋- 웃어준다.
“야- 이제 좀 보냐?”
퍽-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게 발로 류환을 찬 진우에 이제는 해진마저도 섬뜻함을 느낀다. 뭔가... 그래 무언가 삐뚜름한 진우가 굉장히 살가운 표정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류환의 몸을 잘근 밟고 올라가며 입을 땐다.
“너 병신이냐? 진짜 머리 안 돌아가나 보네?”
기묘한 남조선 말과 북의 억양이 섞인 말투.
퍽-하고 몸무게를 실어 류환의 복부 위에 엉덩이를 대고 앉는다. 그에 그제야 으-하는 신음을 내뱉는다. 그 모습에 코웃음 친 진우가 삐딱하니 고개를 틀고는 류환을 내려다본다.
“야- 북이 돈이 그리 많은지 알아?”
“......”
말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류환에 그 하회탈 같은 얼굴을 버리고 시니컬한 모습을 그대로 보이는 진우가 그 얼굴과 같이 시니컬한 투로 말을 잊는다.
“니네 조원들하고 딸린 가족들만 해도 적어도 10명이 넘어. 그리고 다른 조원들까지 합치면 50명이 넘지. 거기다 동생이나 형제들이 있다면 순식간에 100명으로 불어나. 훈련병 3군, 2군, 1군까지 하면 순식간에 천여명을 넘지. 그런데... 그 많은 인원을 먹일 돈이 있네? 북이? 정부가? 핫!”
툭툭- 말없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검은 눈을 보며 진우가 류환의 볼을 손등으로 친다.
뒤에서 그 모습을 말없이 보던 해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짐작하던... 그런 이야기를 남의 입을 통해 들으니 점점 생생해진다. 벽에 기댄 수혁이 무표정하게 안경을 치켜 올렸다.
“야.. 너 그거 알어? 김정일 시체 보존비가 11억을 넘어.”
김정일. 그 말에 저도 모르게 4명이 몸을 움찔거린다. 지독한 세뇌야-하고 진우가 얄상하게 웃었다가 다시 삐죽이는 웃음을 지으며 류환의 볼을 툭툭- 친다.
“근데, 웃긴 건 관리비용에 또 10억이 깨져. 거기에 김일성하고 시체 안치소인 주제에 으리으리한 그 건물까지 합하면 1조원이 넘게 깨져. 알아?”
빤-히 죽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류환에게 비웃음마냥 날카로이 웃어주는 진우의 두 눈에 진득한 증오가 차올라있었다.
“그런데, 너네 오마니나 우리 죽은 가족들 시체는 어떻게 되는지 알려줄까?”
“......”
그 검은 눈이 일렁임에 진우는 정녕 해사하게 웃어주었다.
“쓰레기통에 처박혀. 아- 운이 좋으면 무덤이 생기기도 하더라. 그런데, 수용소에 들어간 거면 시신도 못 봐. 실험용으로 쓰거나 개먹이로 주더라고.”
까득-하는 잇소리는 누구한테서 나온 것일까.
“뭐, 수용소가 워낙에 독해야지. 게다가 애초에 죽일 목적으로 처넣은 거잖네? 덕에 들어간 곳이 제일 지독한 정치범 수용소에 처박았으니 사는 게 더 이상한 거야. 기렇지?”
방글거리며 웃는 모습이 이질적이리만치 해맑다.
“에이, 그래도 꼴에 좀 봐준다고 고문이나 실험용 모르모트로 안 쓴게 어디네? 아- 가끔 끌려가기 전에 미색이 뛰어나면 뒤에서 높은 양반들이 기쁨조나 자금 마련 여군으로 빼돌리는 것 같기도 하더라.”
방긋방긋 웃는 그 얼굴이 심지어는 선하기까지 하다.
“뭐.. 그것도 나이가 덜 찬 어린애들이나 그렇지만...”
방긋- 웃는 얼굴로 볼을 살살 쓰다듬어온다. 류환은 그 모습을 망연하게 올려다보았다.
“....어떻네? 지금 기분이.”
“......”
“죽고 싶어? 자신 때문에 오마니가 죽은 것 같아서?”
울컥-하고 류환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손을 억세게 쥐어 잡는다. 그 모습에 정녕 환한 웃음을 지은 진우가 그 손을 쳐내며 다시금 손을 높이 든다.
아직도 그 얼굴 위에 웃음이 떠날 줄 모른다.
짜악--
“...헐, 저건 좀 아프것네.”
해랑의 중얼거림에 순간 흠칫한 수혁과 해진이 해랑을 돌아본다. 아니, 왜?!
“아하- 이제야 좀 정신이 드네? 원 소좌 동무.”
“.....그래서..”
빠득- 이를 가는 소리에 다시금 다른 셋의 시선이 그네들을 향해 돌아간다.
“어떻게 하라고, 나보고!!!”
“.....”
버럭- 소리 지르는 음성에 진우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한다.
“좀 소리 줄여라. 여기 방음 거지다.”
“........”
해진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저거 어디서 들어본 말인데?
“죽고 싶어? 자살하고 싶어? 그냥 이대로 끝내고 싶네?”
“.....”
으득으득- 이를 가는 소리를 들으며 진우는 정녕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야- 나말이야 실은 나이 34이다. 이름은 진우가 맞지만 성은 지야. 웃긴 이름이지 않네? 하필 지진우가 뭐네, 지진우가.”
짜증어린 말투에는 애정이 서려있다.
“기래도 내래는 이 이름이 좋아. 유일하게 가족이 남긴 거니까.”
“....”
“나랑 가족들도 전부 수용소에 가쳤었어. 정부에 충성을 받쳤는데, 뭐가 눈엣가시였는지 어떤 놈이 위에다가 말도 안 되는 모함을 한 거야. 뭐였더라? 김일성 사진에 대고 손가락총질(삿대질)을 해댔다나? 야- 난 그걸로 끌려갈 이유가 될지도 몰랐는데 되더라고. 한창 기강잡고 있을 때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끌려갔어.”
회상이라도 하는 듯 시선을 위로 한 채 얼굴을 찌푸린 진우가 턱을 긁적거린다.
“그리고 나서 뭐.. 다 죽었지. 곱게 자란 양반들이었거든, 우리 집. 운 좋게 탈출해도 곧 바로 잡혀버렸어. 아마 3번째? 그 때 즘이었던가..”
마치, 첫사랑이라도 만난 듯 황홀한 표정을 지은 진우가 다시금 류환과 눈을 마주쳤다.
“김 태원 대좌랑 만났지. 전류 흐르는 철창에서 끄집어내 주더니 남으로 보내주더군.”
“.....”
류환의 눈이 기묘해져갔다. 뒤에 있던 이들의 얼굴이 어지러워진다.
“그가 날 남으로 보내주었어. 덕에 살 수 있었지.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그가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탈북자 중 한 명과 선이 닿아서 아무렇지 않게 남조선인처럼 살 수 있었어. 근데 말이야....”
핑그르- 웃는 눈이 점점 류환의 검게 일그러진 눈과 가까워져 온다.
“내래가 어떻게 그 지옥에서 지금까지 살아온지 아네?”
은밀한 것을 말하듯이 속삭이는 그 목소리에 류환은 검게 흐르는 진득한 감정을 엿보았다. 자신마저도 흠칫- 몸을 움츠릴 정도로 음산한 그것에 류환이 흔들리는 눈으로 마주본다.
“가족이.. 그 지옥에 끌려간 가족들이... 그러더라고- 살아달라고. 서로 말조차 제대로 나누지도 못 하는데 탈출 시도할 때마다 살자고, 살아달라고- 그 어린 동생마저 그리 말하며 철조망에 걸려 타죽었어. 웃긴 이야기야, 기제?”
“......”
격하게 흔들리는 류환의 눈에 그제야 진우가 그 진득한 감정을 아래로 치우며 천장을 보았다.
“그게 10여년도 전의 일이야.”
“윽... 으윽- 아아-”
“고조 그 윗대가리들에게 어떻게 복수할 수는 없지. 그럴 힘이 있을 리 없잖네? 그렇지만 말이네....”
“아...흐윽-”
얼굴 가린 채 우는 류환을 보고 천천히 일어난 진우가 자신의 뒤를 보았다. 맹하니 자신을 보는 해랑과 그런 해랑에게 잡혀 아직까지 적의어린 눈과 혼란한 눈으로 보는 해진, 그리고 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은 수혁까지 마지막으로 본 진우는 다시금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통수는 쳐줘야지, 좀 시원하지 않갓어?”
히죽-웃는 목소리에 수혁은 한숨이 터져 나온다.
저건 또 뭐하는 또라이야.
===================================
Episode. 탈북자 이야기(부제: 전조의 기다림)
자신의 집은 굉장히 잘 사는 집이었다.
북한의 여타 고위직이나 좋은 혈족들이 그러하듯 비싼 외제차에 남부럽지 않을 사용인들이 넘쳐나는 그런 환경의 집안이었지만, 적어도 우리 가족들은 아늑했다. 아마도 아버지가 정보 쪽을 다루는 직업이어서 그랬던 것도 같다.
그게 문제였던 걸까-
“어..엄마!!!”
“여, 여보!! 아..안돼!!”
어느 날 갑자기 쳐들어온 군인들의 군홧발에 우리 가족들은 무참히 짓밟혔다. 이유는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알 수 없다. 단지, 그들에게 정보를 다루면서도 온화했던 아버지가 눈엣가시처럼 보였던 것 같다. 온화한 아버지- 그 아버지 밑에 있던 사용인들 중 몇몇이 등을 돌렸기에 아버지는 고문과 함께 자백조차 없이 총살당했다.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처박힌 곳은 아마도 인세의 지옥.
그 쯤 되지 않았을까?
“.........”
서로가 말없이 배당된 일을 한다.
어렴풋이 아버지의 일을 도우며 알게 된 북의 현실은 지독했다. 빈민과 최하 빈민, 그리고 오로지 상층부로만 이루어진 망가진 피라미드의 이곳의 최하층은 죽음과 시체들로 가득한 쓰레기통이었다.
남녀로 나뉘기에 말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 했던 가족을 그저 눈으로 가끔 일하다 볼 뿐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마당에 이상하게도 나는 속으로 독을 쌓았던 것 같다. 세뇌되듯이 울리는 스피커와 감시 카메라 안에서 지독한 피부병과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자신을 죽이면서 기회를 엿봤다. 언제- 언제에 도망칠 수 있지? 언제가 좋을까? 때는? 어디로? 그런 생각들로 가득한 나날.... 군사 실험이었던가? 잘은 모른다. 단지, 수용소 뒤편으로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다.
기회다. 그렇게 죽은 눈들 사이에서 몸을 틀어 우왕좌왕거리는 감시병들과 간수들의 눈을 피해 박차듯이 도망쳤다. 무언가 큰 일이 났는지 자신과 주위로 우왕좌왕거리는 이들을 어떻게 하지도 못 하고 폭음이 들린 곳으로 가는 모습을 보며 운 좋게도 같이 일하던 어미와 동생의 손을 끌고 달음박질 쳤다. 이걸로 꼭 3번째 도주였다. 저번 도주에 작은 아버지가 죽었다. 첫 도주에는 같이 들어왔던 사촌과 삼촌이 죽어나갔다.
연자죄로 끌려온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나는 알지 못 한다.
“흐윽- 아윽- 가... 가렴.”
그리 말하는 어미의 다리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누더기 옷의 아랫부분을 보고 마주친 눈이 방긋이 웃으신다.
“가렴. 가서... 꼭 살아서.. 기리 살아서... 행복해야 하네?”
그리 말하는 어미의 손을 놓고 동생을 안고 달렸다. 뒤에서 어미의 처연한 눈초리가 따라온다. 눈을 감았다 뜬다.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아마도 어미는 이번 일로 죽을 것이다. 그게 아니여도 도망치는 중에 죽을 것이었다. 눈에서 흐르는 것이 방해된다.
“오빠...”
어미와 같이 가냘픈 목소리가 팔 안에서 흘러나온다.
그리 나를 부르던 아이는 간신히 끊어져있던 그 철조망의 틈을 다 파고들지 못 해 걸려 검게 타들어갔다. 그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할 고통 중에 띄엄띄엄 입이 움직였다.
‘살.. 아야...해.’
그리 말하는 입에 비명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왜냐면... 이미 동생이, 그 어린 동생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껴버렸으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다리를 옭아매는 이 철조망이.
그래서 그리 말하는 거구나. 눈을 깜빡이며 저릿하게 올라오는 전기에 푸들거리고 있었다.
그 때.
당신이.
내게.
왔어.
“........살고 싶네?”
“....살...살.거..야.”
무슨 객기로 당신에게 그리 말했을까?
아직 어린 티가 나는 당신의 눈은 수용소에서도 보지 못한 완전히 죽은 눈을 하고 있었다.
-----------------------------------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자신은 그 사람 옆구리에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다.
죽어가는 숨소리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성큼 성큼 그 나이 때에 맞지 않는 발걸음으로 나아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자신의 화상을 치료해줬다.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했을까... 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여기서...”
“...?”
“조금만 더 가믄 바다다. 거서 좀만 더 헤엄치믄 남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발아래 일정량의 군식량과 약을 내려놓고 사라졋다.
어렴풋이 본 그의 군번과 직위. 아아- 눈을 껌뻑이며 그가 누군지 알았다. 그는 꽤나 유명했으니까.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남으로 도망쳐 몸을 웅크리던 어느 날이었다.
“.....”
“........”
한 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마주친 눈 안에 음울하게 꿀렁이는 감정이 무척이나 살벌했다. 그는 잠시 나를 보더니 이내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의 손에 나는 말없이 따라갔다. 그가 데려간 곳은 웃기게도 고아원이었다. 허-하는 터져나오는 웃음소리와는 달리 확실히 자신은 영약부족이었던지 몸이 또래에 비해 왜소했고, 나이가 어렸다. 허기야 16의 나이 였었더랬다. 그 때가.
“...어....”
“북의 말을 버리라.”
그리 말하며 돌아서는 그를 눈으로 눈으로 쫒았다.
나는 그 날 ‘지 진우’라는 이름의 남한의 고아가 되었다.
...정신병을 좀 앓고 있는.. 뭐, 그런 설정이었다.
-----------------------------------
그와 다시 만난 것은 여명이 밝아오는 어느 날이었다.
내 증오는 지독했다. 북에 대한 배신감과 증오는 북에서 올 처벌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무서움을 능가했다. 나는 나와 같은 이들을 찾았다. 그들의 수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많았다.
그 중에는 북에서 도망쳐 남의 가족을 만난 이도 있었고, 나눠주는 밥으로 삶을 연명하는 이도 있었고, 외국으로 도망친 이도 있었고, 군인도 있었고, 거지도 있었고, 심지어는 뒤에서 어두운 일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단지, ‘국가’를 상대할 수 없어 숨죽여서 또는 이를 갈던 그런 그들을 조심스레 만나고 모았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 둘 모여 집단이 되었을 때 그가 여명을 뒤에 이고 자신을 찾아왔다.
“.....네가...”
“......”
실은 덜덜 떨고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군지 알기에 죽임당할까- 그리 떨고 있었다.
그의 오른 눈에 감긴 붕대에 애써 시선을 집중하며 몸을 바로 했다.
“너... 날 도와라.”
“.....”
그는 그리 말했다.
빤-하고 바라보는 그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뒷통수를 벅벅 긁었다.
거... 아새끼들 겁나 살벌하네. 그가 원하는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 망할 성형까지 해가며 북에 올라갔다 온지 서나 달이 되어간다. 내려와 정보를 정리하고 정리하면 할수록 살벌해지는 내용에 혀를 찼다.
자신도 그렇게 정상적이고 평범한 삶은 아니라 할 수 있지만 이 녀석들은....
“에비- 무서븐 아그들.”
“...어머, 뭐래? 훈남이잖아!”
“어? 그게 중요한검까?!??”
“응.”
뒤에서 흘끗- 자신이 들고 있는 정보를 훔쳐보는 시선에 혀를 차며 서류를 철로 만들어 정리했다.
“......”
“응? 왜 그러니 우리 막내~”
눈을 껌뻑이며 자신의 옆에서 서류를 하나 집어드는 여자 아이를 보았다.
이곳저곳에 붕대를 칭칭 두른 아이를 보며 내심 혀를 찼다. 아.. 맞다. 자신의 멍청함을 탓하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거... 보고 싶네?”
“.....”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웃음이 올라왔다. 그와 동시에 올라오는 안타까움이 올라온다. 아마도 이 아이의 오라비는 남으로 내려오기 힘들 것이다. 나이도 나이거니와... 하고 많은 곳 중 그 곳이라니.... 속으로 혀를 찼다.
아이는 엄연히 말해 필연의 산물이었다.
아이의 오라비에 대해 뒷조사를 하던 도중 운이 좋아 추적에 성공한 케이스.
“기렇구만...”
쓰다듬던 손을 내리고 지하 창문 너머로 밝아오는 여명을 보았다.
당신이 말한 때를 나는 기다리고 있다.
10여년의 세월동안 이를 갈던 이들 중 몇 명이 사라졌다.
죽은 이도 있고, 도망친 이도 있고, 포기한 이도 있으며, 우리 손에 사라진 이도 있다.
그러나 아직 기다린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은 ‘내’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니-
“고조.. 혹 아네? 쪼메만 기달려부러.”
“...네.”
고개를 숙이는 아이에게 하회탈의 그것과 같이 웃어주었다.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한 그 말을 믿으면서-